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 7: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하다


선조 (14대. 1567(16세) ~ 1608) : 1608년 사망

붕당정치 시작
. 벗붕 무리당
. 생각 학문이 비슷한 사람끼리 뭉친 집단
. 사림
1575 외척에 대한 기준
. 동인 강격
. 서인 온건 
. 선조는 동인과 서인을 왔다갔다하며 붕상 이용하여 줄타기 했음
# 후반으로 갈수록 동인이 우세

1583. 율곡 십만양병설
1592. 4 임진왜란
1592. 7 한산도 승리 (#현 통영)
1592. 10 진주성 승리 김시민 + 의병 곽재우
1593. 1 명나라 참전
1593. 2 행주산성 승리 권율
1593. 4 1차 화의 명과 일본의 거래 조선은 없었음
1596 임진왜란 종료
1597. 1 왜군 재침략 정유재란 시작
1598. 8 도요토미 히대요시 사망
1598. 11 노량해전 정유재란 끝. 전쟁 끝

다른 시각
. 임직왜란은 임진년 왜가 난리쳤다는 뜻
#. 조선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듯한 표현
. 임진왜란이 아닌 조일전쟁으로 봐야
.. 하지만 조일로 보기엔 약하다는 시각도 있음

임진왜란(조일전쟁) 후

조선
. 국토 황패
. 문화제 회손
. 많은 사망자
. 제정의 빈곤 등등
. 공명첩 : 돈만 바치면 주는 관직 (#공수표)

. 여진족(청)에의해 망함

일본
. 조선인 납치 등으로 도자기와 성리학 도입
.. 이상평, 도자기의 신, 신사가 있고 세계명품
.. 아리타 지역 400명 전통 사쓰마 도자기 
. 에도막부로 변화

광해군 (15대. 1608(34세) ~ 1623) : 1641년 사망

1618 명나라가 군사를 요구 (후금과의 전쟁 중)
. 광해군은 대충 싸우며 균형 외교

인조 (16대. 1623(29세) ~ 1649) : 1649년 사망

1623 인조반정 : 광해 쫒겨나고 인조 즉위
인조반정의 원인 : 광해군이 행한 일들
. 무리한 왕권 강화
. 영창대군(왕비의 아들) 죽임 (광해는 후궁의 아들)
. 인목대비 왕비에서 쫒아냄
. 무리한 궁궐 공사
. 명나라와 후금 균형 외교 #사대주의 나라

1627 정묘호란
금이 명과의 전쟁 전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전쟁. 성공

1636 병자호란
. 후금이 청으로 이름 바꾸고
.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왕이 직접 공격 
. 남한산성 투쟁
. 삼전도 굴욕
.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질로 청으로 
.. 봉림대군은 추후 효종이 되고 청에 부정적



당시 조선여인의 삶
. 남 15, 여 14세 혼인 가능 성인 인정
. 조선은 성리학으로 여권 약화
.. 삼종지도, 칠거지악 : 왜란 호란으로 고착화 
. 남 사랑채, 여 안채 따로 기거 : 서로 예를 지켜야 위엄(남), 공경(여)이 가능하다 여겨
. 남-문방사우, 여-규중칠우
. 열녀비 : 최초에는 정절만 요구하다 죽음까지 강요. 은장도-은 젓가락(독 확인용)
. 전통혼례식
.. 모란꽃 병풍 : 풍요로운 삶
.. 소나무-대나무 : 변함없는 마음
.. 밤-대추 : 다산
.. 표주박 : 하나가 된다는 뜻


효종 (17대. 1649(31세) ~ 1659) : 1659년 사망

현종 (18대. 1659(19세) ~ 1674) : 1674년 사망

1659 서인에 대한 기준으로 동인 구분
. 북인 강경
. 남인 온건
. 서인이 승 (인현왕후-서인 대 장희빈-남인)
남인에 대한 기준으로 서인 구분
. 소론 온건
. 노론 강경
# 누가 승?

상복문제가 왜 이슈였냐?
. 당시 성리학 중시 전쟁 후 '예'가 더 강조

숙종 (19대. 1674(26세) ~ 1720) : 1720년 사망
. 붕당정치를 시이소 형태로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대립만 커짐
. 대동법 변경 -> 공인 생기고 수공업 발달

경종 (20대. 1720(33세) ~ 1724) : 1724년 사망

영조 (21대. 1724(31세) ~ 1776) : 1776년 사망
1725. 탕평책
. 백성을 위한 정책 다수
.. 금주령
.. 균역법 (군면제로 군포 납부 2필 -> 1필)
.. 형벌 제도 개선

18세기 당시 조선은
. 17세기는 화폐가 어색해 사용이 미비
. 모네기 등 농업 기술 발달로 먹는 것에서 파는 것으로 바뀌며 '부'축적 
. 부는 잉여 인력을 발생시켜 상업발달
. 빈부격차가 증가
. 사치 증기

정조 (22대. 1776(25세) ~ 1800) : 1800년 사망

1776 
. 정치 : 사도세자 죽임에 대해
.. 벽파 강경 : 노론
.. 시파 온건 : 소론, 노론, 남인
# 순조 때 주도권 시파로

. 문 : 규장각 (도서관+인재양성) 
.. 개혁정치 연구, 서양 도서 등 교류
. 무 : 장용영 (군대)
. 상업 발달 : 금난전권 (1791)
.. 한양 내 장사 권한 독점폐지
.. 장시
.. 포구

1797 화성 완공 
. 새로운 수도 구상, 계획도시
. 공사시 품삯 지급 (영조부터 지급)
. 배다리 : 한강 건너는 방법, 창덕궁 -> 노량진)
. 의궤 : 정교한 기록 문화 증명


실학
. 참된 학문, 현실 도움 학문
. 양반의 권위는 낮아지고 개방된 문화로 경제는 부흥
. 소설, 그림 등 흥행
.. 소설 : 탈춤, 판소리, 소설(춘향전, 양반전 등)
.. 그림 : 김홍도, 신윤복 (풍경에서 사람, 중국에서 국내로, 양반과 백성 모두 다룸)
. 신분제와 남녀 경계가 약화

. 농업 : 유형원 (반계수록), 이익(성호사설,1740)
. 외교 : 북학파 박지원(양반전, 허생전, 열하일기), 박제가(북학의), 홍대용(천문학, 1765)
. 정약용(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권 집필)
. 김정호 : 조선초 부터 작성된 지리지와 지도로 만든 지도가 대동여지도 (목판 22첩 7m 크기)

# 영정조 시대
. 18세기 중후반 외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
. 시대의 변화 시작!!
. 그 때 영국은 증기가 발명되고 산업혁명 시작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 6: 새 나라 조선이 세워지다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 6: 새 나라 조선이 세워지다
2012년


우왕 (32대. 1374(10세) ~ 1388) 1389 사망
창왕 (33대. 1388(9세) ~ 1389) 

1388  
이성계 위화도 회군하여 공양왕 세움

공양왕 (34대. 1389(세) ~ 1392) : 1394년 사망

토지 조사 후 나라 것을 농민 것으로 하며 신망을 높임

1391
과전법 실시 : 현직 관리만 월급을 주는 봉급 체계, 세습 불가
. 귀족 세력 약화 -> 나라 제정 탄탄 -> 농민 소득 높아짐

1392
온건파 정몽주 암살
공양왕 폐하고 왕이 됨
조선 시작


태조 (1대. 1392(58세) ~ 1398) : 1408년 사망

1394
한양 이전 : 풍수, 자연적 요새, 한반도 중앙 (육로, 수로 이용 용이)

성리학의 나라 
. 4대문 : 인(흥인지문), 의(돈의), 예(숭례), 지(소지-숙정), 신(보신각)

경복궁의
좌는 사적단 : 날씨를 중시 여김 (농사가 근본)
우는 종료 : 조상  

피맛길 : 높은 사람들의 '말'을 피하는 길


정종 (2대. 1398(42세) ~ 1400) : 1419년 사망

1398
1차 왕자의 난 : 이방원(5째)이 정도전과 세자(막내)를 죽이고 이방과(2째) 정종 즉위

2차 왕자의 난 : 이방간(4째)가 일으켜 실패


정종 (3대. 1400(세) ~ 1418) : 1422년 사망

1400
이방원 태조로 즉위
왕권강화 행보 
. 사병과 외척 없애 
. 육조직계제 실시 (1414)
. 전국 8도로 나누고 지방관의 직접 임명
. 호패법으로 16세 이상 남자는 세금, 국방의무 등 관리 (1414)

세종 (4대. 1418(22세) ~ 1450) : 1450년 사망

1418
세종 즉위
. 집현전 - 인재
. 과학 - 농업
. 훈민정읍 - 백성 개도
. 왜구 정벌 
. 4군6진으로 현재 북한 북쪽 국경선 확정

문종 (5대. 1450(37세) ~ 1452) : 1452년 사망

문종 #단명이라 그런지 그냥 지나가고

단종 (6대. 1452(12세) ~ 1455) : 1457년 사망

1452
단종 즉위
수양대군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형제)이 섭정
한명회

1453
계유정난
. 동생 안평대군이 반역을 꽤했다는 빌미로 김종서, 황보인 등 제거 : 권력 강화
. 이후 단종 편이던 금성대군도 죽임 : 미래 위협 제거

양반 : 문반과 무반을 합친 말
보부상 : 돌아다니는 상인, 보상과 부상을 합친 말 (작은 물건 + 큰 물건)
사농공상 : 계급 순위 표현 : 관리 - 농업 - 수공업 - 상업


세조 (7대. 1455(39세) ~ 1468) : 1468년 사망

1455
세조 : 수양대군이 직접 왕위 오름 
. 사육신 ( =사행, 생육신)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 단종 유배
. 왕권강화 
.. 집현전 폐지
.. 육조직접 관리
.. 호패법 재시행
.. 현직 관리만 토지 지급
.. 서울에 군사력 높임
.. 공신 편애 :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파

예종 (8대. 1468(27세) ~ 1469) : 1469년 사망

예종
. 17~20살에 수렴청정
. 사림(김종직 등)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잡아 


성종 (9대. 1469(13세) ~ 1494) : 1494년 사망


성종
. 경국대전(법전)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짐

통치제도
왕 직속 기관
. 의정부 : 삼정승 논의로 국사를 결정하는 의사결정 기구
. 승정원 : 왕의 비서
. 의금부 : 죄인을 다스리는 곳

삼사
. 사헌부 : 관리자의 비리 감시
. 사간원 : 왕과 관의 잘못 비판하고 지적
. 홍문관 : 경연, 기록, 정책자문

기타
. 춘추관 :  역사책 제작
. 성균관 : 성리학 교육


연산군 (10대. 1494(19세) ~ 1506) : 1506년 사망

사화 4번 겪음
. 사림파가 죽거나 유배 등을 당함
. 사화란 선비가 화를 입다는 뜻 
. 1498 무오사화
.. 사림이 실록에 단종을 제거하고 세조가 즉위한 내용을 넣으려다 
.. 잔소리가 싫던 연산군이 이를 빌미로 사림 
제거
. 1504 갑자사화
.. 연산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사약으로 죽게한 것에 찬성한 사람들 모두 제거
. 사화를 통해 초기 왕권 강화
. 강해진 권력으로 놀이에 빠짐
.. 흥청원 : 예쁜여자 흥청'이라 불림
.. 흥청망청의 어원
.. 금표를 세우고 사냥터 만듬 
. 훈구파 중심으로 반정
.. 반정은 바르게 돌린다는 뜻
. 중종 즉위


중종 (11대. 1506(19세) ~ 1544) : 1544년 사망

. 사림(조광조)을 불러들여 훈구와 권력 균형 노력
. 1519년 기묘사화 
.. 사림의 잔소리도 듣기 싫고 세력도 너무 커져 훈구파의 상소로 사림 정리


인종 (12대. 1544(30세) ~ 1545) : 1545년 사망


명종 (13대. 1545(12세) ~ 1567) : 1567년 사망
 
. 12살 제위 어머니 문정왕후 수렴
. 문정왕후와 그의 동생 윤원형이 권력 잡음
. 1545년 을사사화
.. 인종 측근, 반대 사림파 숙청
. 지방에서 사림은 내려가
.. 서원(사림학교), 향악(고을의 약속)으로 지방 세력 확보

선조 (14대. 1567(16세) ~ 1608) : 1608년 사망

. 성리학 우대 사림 불러드림

성리학 발달
. 1500년대 

. 서경덕(독학) -> 이황, 조식 -> 이이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 5: 고려 위기 속에서 길을 찾다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 5: 고려 위기 속에서 길을 찾다


2012년


숙종 (15대. 1095(42세) ~ 1105)


※ 제주도 편입 (1105)

. 물 건너에 있는 큰 고을이란 뜻

. 그전까지는 별도의 나라 '탐라'



의종 (18대. 1127~1173)
. 무예에 능하고 놀기도 좋아 함
. 아버지 인종 당시 반란이 잦아 어수선하여 자신의 세력화를 위해 측근과 자주 놀고 권한도 줌
. 그런데 이들 측근이 대부분 문신이고 무신을 홀대하여 정변 발생


※ 환관
. 과거에는 과거로 합격한 왕의 측근으로 엘리트
. 지금 우리가 말하는 내시
 


무신정변 (1170~1258) : 무신이 정치적 변을 일으키다

. 권력 장악 후 욕심은 문신보다 더 하고 머리는 문신보다 덜 해 

. 백성은 힘들고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줄줄이 서로 죽이며 권력이 옴겨 감

. 마지막이 최충헌 4대에 걸쳐 60년간 집권

. 최충헌은 봉사 10조를 이용해 도방, 교정도감(#현 국정원) 설치하여 집권 강화

. 최우는 정방(인사 결정권), 마별초 야별초 등을 설치하여 지속적 집권



※ 도방 : 무신 보디가드 군대

※ 마별초. 야별초는 도방을 세분화, 전문화하여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

. 마별초 : 말을 타는 특수 부대

. 야별초 : 밤에 활동하는 특수 부대 



망이망소이 난 (1176~1178) 

. 정중부 집권시기

. 명학소 사람들 주도의 농민 봉기 


※ 명학소 : 향-소-부곡 중 하나로 난 등으로 차차 없어짐



난(봉기:)이 잦은 이유

. 살기도 어려웠는데 무신들의 난으로 엄격한 신분제가 무너진 것을 지켜보고 수시로 잃어남


※ 봉기 : 벌 때 같이 들고 일어난다. 


김사미, 효심의 난 (1193~1195) 

. 이의민 집권시기

. 농민 봉기


만적 (1198)

. 최충헌 집권시기

. 노비봉기


※ 노비 : 노(남)비(여) 여자가 더 비쌌다. 출산 가능한 사람이기 때문




몽골 전쟁 (1231 ~ 1259)

. 몽골 : 칭기스칸 50년만에 대제국 건설

. 몽골과는 적절히 관계를 맺고 그게 간섭없어 적절히 조공하던 중

. 몽골 사신이 돌아가다 죽은 것을 이유로 침략했는데 져서 강화를 맺음

. 이후 최우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나 내륙의 백성들은 몽골에 의해 짖밟힘


피해상황

. 백성 매년 20만명 끌려감

. 문화제 소실

. 재산 피해 막대


처인성 전투 (1232년 12월. 경기도 용인)

. 백성이 스스로를 지키려고 전투에 참여 

. 승려 김윤후 이끔


# 이후 처인성 사례를 바탕으로 백성 스스로 저항하는 것이 생기지 않았나?


최의를 제거하고 몽골과 강화를 맺기 위해 태자를 보내는 와 중 뭉케칸이 사망

후계자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

아릭부테와 쿠빌라이 간의 다툼이 발생

태자(원종 24대)는 당시 상황이 불리한 쿠빌라이를 찾아가 신뢰를 받고 고려의 불가침 약속을 받음

몽골 전쟁 마무리 됨 (1259)


팔만대장경 (1236 ~ 1251, 16년)

. 초고 대장경 불타서 몽골 침입을 막고자하는 기원




원종 (24대. 1259(40세) ~ 1274)



삼별초 (1269~1273)

. 야별초(좌별초 + 우별초) + 신이군 (몽골과 전쟁 중 포로가 되었다 탈출한 병사) # 구별한 이유는 뭘까? 차별?

. 초기에는 최씨 정권의 보디가스 역할의 조직

. 후기에는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역할

. 원종의 해산 명력에 불복하며 진도 중심으로 별도의 나라를 세움 (지금 전라도 지역 일부까지 확장)

. 세력이 커지자 원의 도움을 청해 해결

# 몽골과 원종의 연합에 자신들의 살길이 없어 항복하지 않음을 명분으로 버틴 듯



삼국유사(1281. 충렬왕) vs 삼국사기(1145. 인종)

삼국유사 : 저자 일연. 개인 저서. 백성에게 자부심과 희망주려 제작. 정치,권력,외교+이야기(신화,전설,백성,불교,향가). 예로 부터 전해오는 일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국가 저서. 지배층의 단결을 위해 제작. 정치,전쟁,외교의 사실위주. 유교 중심



불교

. 원당 : 위패를 모시는 절

. 불화 : 원당 발달로 불화도 발달

.. 물감을 뒷명에 발라 비치도록 만듬

.. 앞면의 그림은 선이 일정

.. 기계로 재현 불가

.. 금가루 사용

. 사경 : 불교, 경전을 손으로 베껴 쓰는 것. 신성한 행동으로 여겨 제작



원(몽골) 간섭기 (1258~)

.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설치

. 태자와 원 공주 결혼 

. 태자는 일정기간 원에서 지내다 와야 했음

. 당시 왕들은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이름에 '충'자가 들어 감 (25대 충열왕 ~ 30대 충정왕)




충선왕 (26대. 1298(24세) ~ 1313 )


. 대부분 원에 머물며 고려에는 잘 안감

. 원에 과거를 제안하기도 함

. 만권당 (개인 도서관)에서 학자 교류 유도하여 고려에 성리학이 적극적으로 유입되는 계기


당시 원나라의 영향으로 유학파 많았다.

출세의 지름길 # 지금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와 비슷한 듯

이슬람 등 외래 문화와의 교류로 세계관 넓어짐



최영 (1316 ~ 1388 )
. 문신 집안의 무신
. 당시 왜구 침입이 잦아 출동하여 소탕  : 홍산대첩(1376. 공주)
.. 왜구의 침입으로 백성이 힘들어 세금이 적어 국력도 약함
.. 1년에 50번 동,서,남해 모두 침입
.. 고려가 어수선하면 내류까지도 침입

이색 (1328 ~ 1396)

. 고려 원 과거시험에 모두 통과한 인재
. 성리학자
. 경세제인 목표 : 세상을 다스려 백성 구제
. 성균관 책임자 대사성 역임
. 정몽주, 정도전, 조준 후배 양성하여 신진 사대부 만듬

이성계 ( 1335 ~ 1408 )

. 쌍성총관부 지역 출신 (변방 출신)

. 홍건적, 왜구, 여진족, 원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영웅

. 황산 대첩 (1380)



공민왕 (31대. 1351(22세) ~ 1374)


. 왕이 되기 위해 원의 노국공주와 결혼

. 그런데 사랑하게 됨


. 고려의 왕권은 약했다.

.. 재상회의인 '도평의사사'에서 중요한 결정은 모두 하고'

.. 정방에서 인사권 모두 결정 하고

.. 부원세력(원 추종)이 원을 등에 업고 득세 (홍씨, 기씨-기황후 등)

.. 권문세족(권력있는 집안, 세력있는 족속)이 득세


. 왕권강화 시행

. 정방 폐지 

. 몽골 풍습 금지

. 숙청

. 쌍성총관부, 정동행성 이문소 없앰

.. 당시 원은 홍건적의 난 등 반란과 질병으로 정신 없었음. ㅎㅎ



※ 몽골 풍습

.  족두리, 연지곤지

. 언어 : 마마. 수라. 무수리. 마누라. 00치


. 위기

.. 홍건적 침입

.. 기존 세력의 저항

... 자객

... 몽골군 투입

... 반란 등등

.. 노국공주의 죽음

... 개혁 의지를 잃어 현 권력과 관계가 없어 보인 신돈에게 권한을 주다 시피 함


신돈 ( ~ 1371)

.. 전민변정도감 시행 (1366) : 땅을 백성에게 노비를 양민으로 

.. 성균관을 통해 신진 사대부를 양성하여 개혁을 강화하려 했으나 불교 불신으로 균열

.. 기존 세력(권문+부원)의 방해

.. 신돈 처형되고 개혁은 물건너 감


※. 안동 축제의 '놋다리 밟기'는 '홍건적의 난'때 왕과 공주가 안동까지 도망친 사연으로 만들어짐



최무선 (1362 ~ 1395)

. 화약과 관련 무기 개발

. 1377년 화통도감 만들고 총 책임자로 임명

. 1380년 진포 대첩에서 최초의 함포 해전으로 500대를 100대로 승리

. 1389년 대마도 공격 왜구 침입 감소



성리학 계보
: 안향 -> 이제현 -> 이색 -> 정몽주, 정도전




우왕 (32대. 1374(10세) ~ 1388) 1389 사망


창왕 (33대. 1388(9세) ~ 1389) 

1388 
이성계 위화도 회군하여 공양왕 세움

공양왕 (34대. 1389(세) ~ 1392) : 1394년 사망












한국생활사박물관 3 - 고구려생활관


2001년



한국생활사박물관 3 고구려


[산성의 나라]

고구려 = 높을 고 + 마을 구루
170개 산악지대

산성의 구조
. 산성 + 평지성 = 이중 구조 
. 이중구조 + 나(성 밖 마을) => 지자체
. 도시와 농촌 구별 시작
. 환도산성 + 국내성, 대성산성 + 안학궁

부경 : 개인 다락 창고  # 사적 부의 축적 예상

대장간 : 철기의 대중화 의미 (야철신) 
. 그리스 헤파이스토스 (대장앙이 신)과 유사
. 복장과 모습으로 보아 우대 직업 예상

수레 이용 : 도로를 사용했다는 의미
쇠바퀴는 고급차
. 수레 바퀴신 (제륜신)
. 당시 당나라가 1080대의 수레를 징발했다는 기록 # 중요한 물건
. 조선시대에도 수레가 없었다 한다 #???



[고조선]

동명성왕 - 주몽
. '동명'은 부여 시조로 고구려가 부여의 후손임을 알리는 역할

입식 생활 : 의자, 평상, 쪽구들
# 지역적 요소로 추운 지방이라 냉기를 막기 위해 입식

물이 안 새는 토기(경질 토기) 
. 유약을 안 바르고 600도에서 구운 토기 
. 발효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됨 -> 간장 개발 (적은 소금으로 더 짜게 더 많이 만듬) 중국이 부러워함

맥적 : 간장으로 저린 고기 음식으로 구워서 먹음.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

식탁 이용 : 당시 중국은 도마에서 음식 먹었음

서옥제 (데릴사위제)
. 서옥에서 결혼 생활 시작해
. 아이가 크면 신랑 집으로
. 노동력의 형평성으로 시행한 듯

경당
. 고조선 화랑
. 문무 모두 중시

효도 : 절대 복종

전쟁
전쟁 초기에는 지배층과 부유한 백성만 참여하고 전리품도 그들만 챙겼음
4세기 후반 대규모로 바뀜


[벽화 + 별자리 + 사신도]

벽화 - 각저총 (5세기)

 방향

표현

그림

의미 

해 

 세발 까마귀

 

 두꺼비

 옥토끼, 계수나무

복 

불사 신화 관련

 

 

현세/무병/장수 

 

 

 내세/불사


별자리

동 : 심수(전갈자리) + 방수 => 심방육성 (동쌍삼성)
서 : 벌성(오리온자리) + 삼수 => 삼벌육성 (서쌍삼성)
남 : 남두육성 (궁수자리)
북 : 북두칠성 (큰곰자리)

사신도  
. 수호 + 액운 막아
. 천장에 그려져 있다 6세기 부터 벽면으로, 풍수로 인해 지상으로 내려 온 듯
동 : 청룡 : 봄, 생산(먹고 사는 것)
서 : 주작 : 여름, 날으는 기운
남 : 백호 : 가을, 죽이는 것 (사냥)
북 : 현무 : 겨울, 주인공 부부
.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도 방위 개념 없었음
# 풍수의 시작?

악단 구성

신과 인물의 가까움 (불, 농사, 바퀴, 대패질 신)
-> 농사 수공인 우대 시대
-> 실리 문화 예상



[벽화]

벽화를 가진 민족은 미술의 '족보'를 가진 민족
고구려 벽화는 우리 민족의 독자성과 우수성의 증거
# 과거로 돌아가 시대상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

벽화의 변화
- 고인의 생활관 + 하늘세계 표현
-> 연꽃 장식이 추가
-> 사신도 위주 : 주술적, 예술적

고인 만을 위한 예술작품 #내세에 대한 믿음 반증

무덤은 살아서 준비하고
죽으면 슬퍼하고
장례 시 축제를 벌여 고인을 보낸다


세계 벽화

고분

이집트 (기원전 27 ~ 11세기)
. 신(왕)이 원래 있던 사후세계로 돌아가 계속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 아름다움이 아니라 완전하게 그리려 노력
. 완전은 빠짐없이 표현 (얼굴은 측면, 몸은 정면, 다리는 측면으로 엇갈려)

고구려 (기원후 4~7세기)
. 죽은자의 집이자 하늘세계로 가는 통로
. 완전하게 묘사

사원

둔황의 석굴사원 (기원전 4~11세기)
. 실크로드의 여행자와 상인의 길목
. 불교는 문화 교류의 촉매제 역할


도시

폼페이 (기원전 3~1세기)
. 현실 세계의 풍요와 여유 묘사
# 같은 시기 다른 장소에 비해 매~우 세밀, 지금의 서양화 같음
# 여유있는 사회가 예술을 발달시키나?
















한국생활사박물관 1 - 선사생활관


2002년



시대 구분의 종류


 사용 도구 기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문자 사용 기준

선사 시대

 

역사 시대

 

 먹거리 기준

수렵과 채집

농경과 목축

 

 

 사회 형태 기준

원시 무리

모계 씨족

 부계 씨족

 


# 년도는 계속 논의 중으로 확실한 것은 없는 듯 대약으로 이해, 국내는 별도로 정리 필요할 듯

전기 구석기 : BC 2,500,000년 ~ 200,000년

후기 구석기 : BC 40,000년

신석기 : BC 8,000년 ~

청동기 시대 : 그리스 BC 3,000년, 중국 BC 1,800년 (한국 2,000년)

철기 : BC 1,500년   (한국은 BC 300년)

이뉴잇 마을의 노래 대결

- 노래를 부르는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 효과로 분을 풀어 냄




한국생활사박물관 2(고조선생활관)


2002년



[청동기 시대 시대상]



재기 등의 유물을 통해 농경 사회와 농사의 중요성 알 수 있음


족장과 무당이 농사에 중요한 날씨에 책임을 지는 사회

좋지 않을 시에 죽음을 당할 수 있었음

그래서 열심히 천문을 관측하고 안내했을 것임


과학적 농사 기법 도입

- 이랑 사용

- 이삭을 따던 돌칼에서 포기로 자르는 돌낫으로

- 절구와 키 사용하여 낱알을 고름

- 다락 창고로 오래 저장

- 수로 시설로 치수


고기잡이

- 통나무 안을 파낸 배 이용

- 고래를 집단으로 사냥


사냥에서 목축으로 자연 통조림

농한기에는 사냥도 병행


청동은 1,083도씨에서 녹는다

그래서 도가니 + 숯 + 풀무 등의 기술이 필수적




[고조선]


예상 :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



집 

- 들보, 서까래, 온돌, 이용 공간의 분할(방, 부엌 등)


음식

- 곡물을 으깨 반죽을 만들어 시루로 쪄서 먹음 : 가마솥 필수

- 소금 사용 (암염, 해조류 이용 수집)

- 음식은 썩어 없어져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늪이 흙으로 변한 화장실 토양을 이용해 식생활 파악



토기

- 민무늬 : 점차 사라짐

- 후기에는 아가리에 띠 생김


옷 

- 멋 부림 : 생존을 벗어난 여유

- 비단, 베, 가죽 신과 모자, 귀걸이. 옥 단추, 청동 허리띄


권력 사회

- 제천행사로 춤과 노래를 불러 협동과 단결 강화

- 종, 방울 등의 제기 소리로 희망, 성스러움을 강조

- 고인돌로 대내외 위엄 과시 (높은 곳에, 크게~)

-- 가족 무덤도 있었다. 



제기 등의 무늬

- 동심원과 삼각은 번개, 별, 태양, 빛 등을 나타내며 

- 강력함 힘을 상징

- 동심원 등 무늬를 촘촘히 세기면 넣으면 빛이 사방으로 잘 퍼지는 효과

- '8'은 확대와 풍요 상징 (사방 팔방)


청동기 칼 

- 3등분 구조, #왜?

- 피 흐르는 홈 #왜? 찌른 후 쉽게 뺄 수 있는 실용성 추가

- 비파형 동검  # 왜 비파형이지? 

- 비파형, 3등분 조립식 등은 중국과 다른 민족성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었다.

- 비파형은 상처를 크게 내어 살상력 증가

- 검날의 돌기와 조립식 구조는 부러짐 방지


국가 

- 법, 문자, 관료, 도성이 나타남


교류

- 남은 자원의 교환 시작

- 말, 배

- 화폐는 중국의 칼모양의 쇠(명도전) 사용  

# 쇠가 귀해서 사용했을 것. 그런데 왜 칼모양?


무덤 (발전 순서대로)

- 고인돌 : 돌

- 돌널 무덤 : 돌판+돌

- 돌돌림 무덤 : 돌 + 나무관

- 널 무덤 : 나무관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듬), 

-- 관 밑에 유물을 넣어 묻음 

#왜 밑이지? 옆이 아니고?




단국신화

- 부(천상)와 모(곰)가 모두 신과 직접 관련 있는 뼈대 있는 나라

- 당시는 하늘과 곰은 신성시 되었다.

- 두 집단의 결합을 의미한다. 아마 천상은 이주민, 곰은 토착민 예상

- 단군(제사)+왕검(정치)를 뜻하며 재정일치사회 : 왕이 곧 신과 연결되어 있다 

#추후 불교의 국교화와도 연결 가능



고인돌

- 거석문화 중 세계 고인돌의 40%가 한국 보유

- 농경이 위주가 되어 정책 사회로 바뀌면서 발생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 4: 고려의 기틀을 다지다



태조 (918~943 재위)


왕건 강화 정책 시행

- '본관'과 '성씨' 사용 적극적 권장

  조상이 살던 지역을 국가에서 인정하여 지역에 대한 자부심 높임

  신라시대에 있었는데 고려의 지방세력 포용과 안정을 위해 적극적 사용

 #이미 있었던 것을 강화하여 효과를 본 것으로 보임. 새로운 것 이었다면 효과가 없었을 것


- 29명과 결혼 : 지방 세력가의 딸들과 결혼

- '왕'씨 하사 : 같은 왕족이라 생각하게

- 사심관 : 수도에서 지역의 일을 살펴보는 관리로 지역 세력가를 임명. 신라 경순왕이 경주 사심관으로

- 기인 : 사심관과 비슷한데 지역 세력가의 아들을 임명하여 수도에 둠 (인질)

- 백성 세금 감면

- 불교 장려


기타

- 축성으로 외적 대비

- 외래 문화 정보를 적극적으로 교류

- 왕건이 죽는 해에 [훈요10조] (943)를 남겨 아들 혜종에게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조언을 남김



종합적으로 귀족이 아니어도 인정 받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함

그래서 고려문화는 다양성이 매우 높다.

# 문화 발전에 큰 기여!!





혜종 (이름 왕무. 912년 탄생, 2대. 943~945 재위)


왕건의 맏아들이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지방세력이 많아 단명 (자객도 보냈다는...)



정종 (3대. 954~948 재위) 


불교 적극 참여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수도를 강한 친척이 있는 개경에서 옮겼으나 단명




광종 (4대. 945~975 재위)


왕권 강화 정책

- 노비 안검법(956) : 억울한 노비를 풀어주는 법 : 군사와 노동력을 줄여 세력 약화

- 과거제도 (958) : 기존에는 집안이었는데 이제는 실력에 따라 인재 발탁 

 -> 추후 유학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어 유학이 차차 정치의 교과서로 자리매김

- 공복색 : 관리가 조정해 나갈 때 입는 옷의 색깔을 계급에 따라 구분 -> 서열화

  자주-적-주황-초록

상기 제도로 집안보다 벼슬이 중요하게 만듬

- 황제의 나라 : 독자연호(광덕, 준풍), 태자, 태후, 묘호(조,종) 등 황제의 격식에 준하게 변경


기타 평가

- 잔혹한 폭군 : 왕권을 잡은 후 말 안 들으면 즉결 처분하는 왕




경종 (5대. 975~981 재위)


신하들을 다독이는 정치, 

신하 왕선을 준용했으나 등 돌려 망한 듯




성종 (6대. 981~997 재위)


신하들과 함께하는 정치. 

최승로의 [시무28조] (982)


나라의 기틀을 잡는 정책

- 기관 : 중서문화성 (정책을 세우고), 상서성(정책을 실행하고), 중추원, 이사대, 삼사 등

- 지역 관리 직접 파견 관리

- 교육 : 국자감(종합대학으로 관리 양성), 지역에 학교 마련



993년 

거란 1차 침략 #(~993년)#언제까지 전쟁 했을까? 1년 이내 전쟁인 것 같다. 

송을 치기 위해서 연합이 신경 쓰이는 고려를 치기 위해 거란 침입

서희가 협상하러 나가 거란의 의중을 잃고 불가침 조약과 강동 6주를 손에 넣음 

(압록강 동쪽 6개의 성으로 개경으로 통하는 길목이고 송-거란-여진 등과 무역하기 좋은 교통의 요충지)



목종 (997~1009 재위)




현종 (8대. 1009~1031 재위)



1010년

거란 2차 침략 #(~1010년 예상)

고려 내부의 반란을 빌미 삼아 침략
개경을 잃고 항복했으나
강동6주에서 양규 장군 등이 퇴로를 차단하고 개릴라를 펼치고 있어
황급히 조약하고 돌아가는 길에 공격하여 피해를 많이 줌 # 쉽게 보이지 않게 됨

1019년
거란 3차 침략 (~1019)
항복 시 약속을 안지켜 다시 공격
강감찬 장군 등이 강동6주의 흥화진에서 살수로 귀주에서 퇴로를 막는 방법 등으로 크게 물리침


1~3차 거란 전쟁으로 고려의 위상은 국제적으로 높아짐

당시 송, 거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두루 친하게 지내며 교류할 수 있는 위치를 만듬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함




문종 (11대, 1046~1083)



최충 (984~1068)

최초의 사람학교 설립, 합격자가 많자 개경에 12개 학교 개교하여 '사학 12도'로 불림

# 과거제도 시행으로 득을 본 거네

1071 

송나라 국교 회복


의천 (문종의 넷째. 1055~1101) 

- 1065 승려가 되다 (당시 승려는 높은 지위를 가짐. #선망 직업)

- 천태종 개창하고 불교 통합 노력

- 화폐(해동통보) 건의하여 시행.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


불교 문화

- 개경에만 절이 800여곳이었고 

- 과거공부, 숙박, 기도, 장례, 시장, 고리업 등을 하고 있어

-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 대장경 : 불교의 백과사전으로 보유 여부가 국가의 불교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

-- '송'에 의해 '초조 대장경'을 '거란'에 의해 '재조 대장경'(팔만대장경)을 만들 수 있었음



숙종 (15대, 1095~1105)



1104.2 

고려군 완옌부가 이끄는 여진족(말갈의 후예)에 패배

거란과의 전쟁 후 100년이 흘러 태평하여 전투력 약화


1104.12

윤관이 별무반 조직 : 기병, 보병, 승병, 특수부대로 17만명



예종 (16대, 1105~1122, 17년 재위)


1107

윤관 여진 땅 정벌하여 얻은 땅에 동북 9성 축성

그러나 정예가 아닌 지방군에 대한 승리

승리 후 지리를 잘 몰라 서로 연락이 안돼 물자 이동이 어려움

많은 수의 군사를 유지하기 위한 물자가 부족하고 국내 노동력 부족


1109

거란이 부담스런 여진이 고려에 먼저 불가침 제안

동북9성을 돌려주고 서약

이후 여진은 금을 세워 '거란'과 '송'을 치고도 고려를 공격하지 않음

(송은 폐배 후 강 아래도 내려가 남송이 됨)



인종 (17대, 1122~1146, 24년 재위)


- '송'을 멀리하고 '금'을 가까이 : 약자는 멀리 강자는 가까이. 실리 외교

- 검소하게 생활하며 사치금지

- 백성 보살 핌 : 지방에 농사를 위한 관리 보내고 병든 백성을 위한 물자 지원

- 삼국사기 제작

- 효과는 크기 않았지만 노력한 군주


1122

인종 14살에 재위

외할아버지 이자겸이 경쟁자 제거하고 딸을 왕비로 보내 왕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됨 #권력 집착!!


1126

이자겸의 난

성장한 인종이 이자겸을 없애려 하다 척준경(여진과의 싸움에서 영웅이 된 무장)에 의해 실패

이자겸은 관련자를 모두 숙청한 사건


이후 인종은 권력에 눈먼 척준경을 포섭하여 이자겸을 제거하고 둘 다 유배 시킴

(영광 굴비 이야기)


1135

묘청의 난

인종은 인재를 찾다 유행하는 풍수도창(풍수지리와 미래예언의 도참)을 한다는 묘청을 만남

묘청은 서경 천도를 하면 금이 항복한다는 예언을 함

그러나 자신을 따르는 세력이 서경에 있어 그리고 수도를 옮기려 한 듯

뜻대로 되지 않자 서경에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반란

김부식이 성을 포위하고 물자를 끊어 1년간 장기전으로 대응 쉽게 제압


1145

인종의 지시로 역사를 통해 교훈으로 삼도록 하기 위해 김부식 삼국사기를 편찬


# 김부식은 문무에 모두 뛰어난 건가?




고려의 문화


계급사회

- 최고 지배층, 중간 지배층, 농민(백정), 특수지역사람, 천인(노비 등)

- 18등급으로 나눠 구분, 서로 간에 혼인으로 '문벌' 이룸

- 과거나 음서를 통해 관직에 입문. 대부분 명예 때문에 과거를 통해 들어가려 함

- 무신, 문신 구분


지방관리

- 지방관은 30개월 단위로 순환 근무

-- 주현 > 속혁 > 향소 부곡 

-- 각 지역(본관)에서 공을 세우는 인물이 나오면 승격되고 죄가 있으면 낮아 진다) # 본관이 중요해 진 것

-- 실제적으로 지방 세력가(향리 : 호장>부호장)가 지방을 관리 

#지방자치제?


월급

- 녹봉 : 1년에 2번 곡식으로 받음

- 전시과 : 땅을 주고 거기서 나온 곡식의 일부를 받아감



가족 (아들 딸 관련)

- 장가간다 (장인댁에 간다)

- 태어난 순으로 족보를 올림

- 결혼해도 친가의 유산은 딸 개인의 것

위 3가지가 조선 후기 때 바뀜

- 유산 동일 분할

- 부모도 제사도 번갈아 가며 모심



연등회 : 2월 보름 개최. 복을 빈다.  

팔관회 : 10월 혹은 11월 보름 개최. 전통신앙과 불교 행사를 함께하는 축제

- 외국인의 참여가 가능하여 '코레아'전파 기여

- 지역적 특성에 따라 믿는 '신' 존중 

#지역 민심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듯

둘 다 신라시대부터 있었음.


벽란도 : 예상강 하구, 개경에서 말로 몇시간 거리로 송, 일본, 아라비아 교류 창구

거란과 전쟁 후 송과의 비공식적 교류 장소 (민간 외교관)


교류물건

- 송->고려 : 금은그릇, 차, 초, 약재, 책 등

- 고려 -> 송 : 금은그릇, 비단, 먹, 활과 화살, 말, 칼, 인삼, 책 등

# 무기를 수출한 나라?

책으로 의술, 불경, 유학 등 다양한 문화 교류가 가능해짐


청자 

- 송나라에서 들어와 발전시킴

- 비색 (푸를 빛), 상감 (일부를 파내고 다른 재료를 넣어 무늬를 만듬)


#활발한 교류 환경이 다양성으로 다양성이 문화 발전으로 문화 발전이 국력으로!!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 3-북쪽엔 발해, 남쪽엔 신라


보라색 발해의 역사


분홍색 후삼국 시대 역사


통일신라 이야기


642년

백재 의자왕 신라 대야성 공격으로 전쟁시작

힘이 약한 신라는 선덕여왕의 지시로 김춘추가 고구려에 도움 요청


648년

거절당해 당나라로 구원요청 감


# 6년이나 돌아다니며 협상 과거의 시간은 매우 천천히 흐른다.


654년

신라의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태종무열왕, 654~661)가 왕이 됨


660년

나당연합으로 전쟁 다시 시작

갑작스런 공격에 백제 패망

황산벌 전투에서 5천대 5만 승부

계백은 출정 전 죽음을 각오하고 가족을 모두 죽이고 출전했다는


667년

나당과 고구려 싸움

연계소문이 죽고 아들들(남생, 남건, 남산)이 이간질에 당해 내부에서 스스로 문을 열고 망함


668년


고구려 패망

고구려, 백재 둘 다 망한 뒤에도 항쟁은 몇년간 지속됨

당나라가 안동도호부, 웅진도독부, 계림도독부를 세우고 통일된 신라를 먹으려 함


멸망한 고구려인은 '영주'로 강제 이주시켜 다시 뭉치지 못하게 함


670년

신라가 백제 땅의 당나라(웅진도독부)를 공격

매소성, 기벌포 등에서 당과 신라는 계속 싸워서 물리침


676년

문무왕 (661~681)에 의해 통일 신라 시작

통일신라의 의미는 과거와 달리 하나의 '단일민족'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계기를 만듬


죽은 후 동해 바다에 묻혀 용이돼 나라를 지키고자 바다의 바위에 안장하는 유언


신문왕 (문무왕 아들, 681 ~ 692) 

문무왕에 감사하여 감은사를 세웠다.


만파식적 : 만개의 파도를 가라 앉히는 피리. 평화로운 세상임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


왕권강화 

9주 5소경으로 지방을 다스릴 체계 만듬 (9주는 현재의 도 개념, 소경은 작은 수도 현재의 특별시?)

소경에 신라 귀족이나 왕족을 이주 시킴

국학에서 지방 관리자 교육 시킴. # 과거 학교

녹읍 폐지 : 세금을 나라에서 걷고 관리에세 지급. 기존에 관리가 걷어 나라에 납부



696년경


'영주'는 거란, 말갈, 고려인이 함께 거주하였고 당 관리에게 힘든 삶을 살았음

거란 이진충이 반란을 하였으나 곧 평정

이틈에 고구려 '걸걸중상'과 말갈 '걸사비우'는 탈출하여 요동으로 이동

이동 중 전쟁으로 둘 다 죽고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무리(고려+말갈)를 이끔


698년 


동모산에 머물며 돌궐과 손잡고 '진'을 세움

고왕, '발해군왕' 칭호와 '발해'로 알려짐

남북국시대 시작


돌굴 (551~747) 당나라를 위협하는 나라로 터키의 선조



702년 

33대 성덕왕(~737년) 신문왕의 둘째, 효소왕의 친동생


정전 시행 : 15세 이상 땅 없는 남자에게 땅을 지급하여 세금 증대

# 귀족들에게 배분된 부를 민간으로 돌려 국가의 자금 확충


당나라와 화해 : 발해(698년)가 732년 당나라를 공격하여 신라에 도움 요청하여 관계 회복

- 신라방 : 당나라의 한인촌  (신라소 : 관청, 신라원 : 절)

- 유학 : 의상, 해초 등 승려 다수 유학 (해초의 왕오천축국전은 4년간 인도 여행기 기록 우리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데 보관은 프랑스에...)

- 빈공과 : 당의 외국인 채용 과거 시험으로 인재 부족으로 만든 시험으로 총70명 합격자 중 신라인 58명

그 중에 18세 수석합격인 최치원 의뜸 

# 어떤 환경이었기에 빈공과가 생겼을까? 


울산항을 통해 세계와 교역 : 경주와 가까워 발달

당, 페르시아(무덤 무인상), 인도, 아라비아, 로마(유리그릇), 일본(먹, 숟가락) 등과 교역

수출 : 금 제품, 인상, 명주, 먹 등

수입 : 양탄자, 상아, 후추, 유황, 수은, 유리그릇 등



719년

 

2대 무왕 (~737)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


732년


흑수말갈을 손 보라고 보낸 동생 대문예가 당으로 도망치고 당은 나몰라라 해서 당나라와 전쟁 시작

산동 공격 승리하여 땅을 넓힘



737년


3대 문왕 (~793) 무왕의 아들

당의 선진 문화 받아들임 : 유교, 불교

상경용천부로 수도 이전 : 당의 장안을 참고한 계획도시

교역을 위해 수도로 통하는 길을 만듬



742년 

33대 경덕왕(~765년) 성덕왕의 셋째

귀족세력의 부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

- 이후 150년간 20번의 왕이 바뀌며 망해감(혜공-선덕-원성-흥덕---)


751년

석굴암 제작 시작 

20년 걸림

석굴은 인도의 양식으로 건조한 나라에 맞음 (인도, 중국은 약한 퇴적암의 돌을 파서 만들고 신라는 강한 화강암을 쌓아서 만들어 세계 유일의 석굴 양식)

# 입구에서 순서대로 지상 - 비도 - 천상

- 팔부신장상 : 8명의 신장(하늘의 장수)로 불법을 수호

- 사천왕상 : 동서남북 수호, 비도에 위치(하늘로 통하는 길)

- 인왕산 (금강역사상) : 문을 지키는 장수

- 십일면관음보살상 : 11개의 얼굴로 (수많은 사람들이 소원하는) 소리를 볼 수 있는 보살

- 10대제자상 : 십나한(덕과 지혜를 얻은 성자)

- 굴 : 문무왕릉과 연결되는 길



기타 인물

원효 (617~686) : 국내파(의상과 함께 유학가다 해골물로 깨달음). 불교 대중화 노력(노래 이용)

의상 (625~702) : 유학파(당나라), 부석사, 낙산사 세움. 사회통합 노력

장보고 (~846)

- 평민 출신으로 골품제도로 인해 출세할 수 없어 당으로 넘어가 군인이 됨. 당시 당나라는 민란이 많아 군사 부족

- 당나라에서 인정받고 있었으나 해적에 의해 노예로 팔려오는 신라인을 보고 흥덕왕에게 요청해 귀국

  당시 신라는 왕권약화로 내부적 분열로 해적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음

- 828년 청해진을 세우고 군사력 키워 해적을 정리하고 군사력+조선 기술+항해 기술로 주변국과의 무역을 독점하다 시피함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흔들리는 왕족(신무왕)과 손잡고 계급 상승을 하려 했으나 귀족 반대로 841년 암살 당함

  (당시 조선기술은 650년 뒤 콜롬버스의 배와 동일 사양으로 250톤을 선적할 수 있었다 함)



818년 


10대 선왕 (830년) 


가장 넓은 땅을 보유한 시대 (동-연해주, 서-요동, 남-대동강, 북-흑룡강) 신라의 3배에 달함

5경 15부 62주로 관리(요즘으로 치면 시, 도, 군/구 정도)

당나라 빈공과에 장원

해동성국이라 불림 : 바다 동쪽 번성한 나라 


861년


48대 경문왕 (~875) 

왕권의 약화와 귀족 세력 강화

귀족이 군대를 키우고 많은 돈이 필요해 땅과 세금을 무작위로 걷어 들임

많은 돈으로 사치와 향략을 일삼음

그에 비례하여 어려운 백성은 도적이 됨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못 듣는 귀를 가졌다는 의미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주인공이 됨



887년


51대 진성여왕 (~897)


889년 원종, 애노 농민 봉기, 역사상 첫 농민 봉기

최치원이 귀국해 시구10조 제안(내용은 전해지지 않음)

- 해운대의 '해운' 작명

- 해인사 묘길 상탑 제작 : 백성을 위로하는 탑

호족의 세력이 커져 후삼국시대를 열다.


호족

- 호: 세력이 강한 + 족 : 친한 무리

- 지방세력으로 골품제도로 출세할 수 없는 사람들로 제력 등을 갇춘 무리

- 선종 종파로 백성을 이끔(선종은 마음을 통해 부처가 되고 귀족이 믿는 '교종'은 글을 통해 부처가 된다)

  선종의 영향으로 차 문화 전파

- 풍수리지설로 현재의 신라가 망할 운세라는 명분도 세움


도선 (풍수의 대가) 추후 왕건 설화에 등장 ^^


892년


견훤이 (후)백제 세움. 수도 완산주. 

견훤은 신라의 군인으로 서해와 남해에서 공이 많았음

귀족의 폭정을 보고 봉기된 농민과 함께 백제 전통을 이어 나라를 세움

적극적 외교를 함 : 중국(오월, 후당), 일본, 거란



896년 빨간 바지 농민 봉기



900년경


왕위 다툼을 시작으로 흔들리기 시작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901년


궁예에 의해 고려(고구려의 줄임말, 후고구려) 세움. 수도 송악(개경). 

궁예는 신라왕자 였으나 버려져 절에서 성장

신라에 대한 원한이 깊었음

농민 봉기 시 원주 양길의 군사와 함께 성장


왕건

무역부자 집안으로 궁예 편에서 장군으로 생활하며 영토 넓히는데 공을 세움

905년 궁예가 철원으로 수도를 이전하고 나라 이름도 마진, 태봉 등으로 바꾸고 

"난 미륵불이다", "관심법으로 보겠다" 등 미친왕이 되어 나라를 위해 반역 함

(궁예에 대한 기록은 왕건을 위한 고려의 기록임 ^^; 

아마 신라출신으로써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임)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워. 수도를 송악으로 


왕건의 통치방법은 포용
궁예는 누름, 견훤은 제거
포용으로 민심을 얻어 삼국통일 가능

견훤이 신라를 공격해서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와 도와주다 패함
그러나 견훤의 신라왕에 대한 무차별적 살육을 보고 호족과 백성의 민심이 왕건으로 돌아섬
(고창전투에서 열세였으나 호족들의 도움으로 승전 : 차전놀이 유례)
견훤은 아들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감금 되었다 고려로 도망


926년 


거란 공격 한 달 만에 발해 멸망


발해가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보는 이유

발해의 유적을 보면 고구려 문화와 유사, 지배층이 고구려인, 국제 문서 등의 표현도 고구려인


935년


신라의 경순왕(56대.~935) 고려에 항복
992년 존속된 신라
마의태자 
- 경순왕의 아들 김일
- 항복에 반발하여 삼배(마의)를 입고 개골산으로 들어 감

- 문경을 울고 넘었다는 하늘재

- 지팡이 꼿아 나무가 되었다는 용문사 은행나무

- 승려가 되기 위해 머리를 깎았다는 금강산 단발령


936년


후백제 멸망. 45년 존속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 2




삼국시대

각 나라는 신화로 나라의 신성함을 알리고자 했다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의 후예
백제는 고구려의 후예
신라는 진한 지역 지방 세력

고구려는 부여가 신하로 대해 사이가 안좋음
결국 싸우게 됐고 고구려가 이겨 물러남
이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겨 부여를 방어하고 압록강을 끼고 발전 도모
부여 정벌 성공 후 옥저 등 영토 확장
진대법 등으로 왕권 강화 : #쌀 대출로 민심을 얻고 귀족의 노비를 줄임

고구려가 먼저 생겼으나 
백제가 먼저 성장
이유는 한강!

강 인근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됨
교통이 편해 교류 용이 : 중국, 내륙 등 교류
이로써 부가 축적되고 문화가 발달

# 삼국의 발전이 사이클 처럼 서로 오르락 내리락 한다. 그 연계성이 중요 ^^

고구려의 고국천왕을  마지막으로 (197년)
백제로 분위기 이동 (234년)

고이왕 ~ 근초고왕

영토 확장, 
율령 반포, 16관등제와 공복 : 체계화된 지시체계와 계급으로 왕권 강화
중국, 왜와 교류

근초고왕 이후 (375년) 다시 고구려로

소수림왕 ~ 장수왕

# 발전을 위한 기초마련 
- 강 인근으로 도성 이전, 율령 반포, 불교 수용 (왕이 부처) 


고구려, 백제는 성씨가 있었으나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 부터 썼다고 함 
성씨를 쓰게된 이유는 중국과 교류하기 위함
박씨, 고씨 등은 후대가 선대에 가져다 붙인 것이라고 함


[백제, 신라]

# 500년 이후는 백재 신라 전성 시대?

백제  무령왕 501 ~ 523   성왕 ~ 554
신라  지증왕 500 ~ 514  법흥왕 ~ 540  진흥왕 ~576

지증왕 : 소로 농사 짖는 우경으로 생산량 증대, 왕호 붙이기 시작하며 나름 독립국가로 나섬
법흥왕 : 불교 수용, 골품제도로 왕권 강화
진흥왕 : 앞선 왕의 기반으로 영토확장 시작. 백제와 연합해 한강유역 수복

골품제도 
- 성골 : 왕족
- 진골 : 말9필, 집크기 24자. 왕 못됨. 
- 6두품 : 말5필, 집21자
- 5두품 : 말3필, 집18자
- 4두품 : 말2필, 집15자
옷, 그릇 등 물품까지도 철저하게 시행하여 왕권강화에 사용
선덕여왕이 왕이 된 이유도 성골 출신이고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


[가야]

금관가야 (김해, 낙동강 하류)
철 생산이 많아 낙랑과 왜와 활발한 무역으로 경제력이 높아 
가약연맹을 대표했음

대가야 (고령)
내륙 깊숙히 있어 전쟁이 뜸했는데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아 무역은 활발히 하고 경제력도 있었던 듯
근관가야 이후 가야연맹 대표

백제+왜+가야가 손잡과 신라를 치려했는데
신라가 고구려에 요청해 막아냄 
이때 고구려는 왜와 가야를 공격
# 가야 멸망의 시작이 되지 않았을까?

금관가야는 고구려에 의해 무역 대상인 낙랑이 망하고
백제, 신라에서도 철이 생산되면서 급격히 쇄락

대가나는 백제(성왕)과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졌다.

대가야와 백제와의 관계가 나빠져
# 왜 나빠졌을까?
신라와 정략 결혼을 시켰는데
신라는 여러가지 이유로 트집을 잡아 영토를 뺏는다.

금관가야는 신라에게 항복
# 왜 기존 우호관계인 백제가 아닌 신라?

가야가 망한 이유는 
. 연합국가로 힘이 분산
. 백제, 신라 간섭이 많아 정치적 발전 더뎌

가야금은 대가야의 악기 '우륵'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왕족


[삼국의 문화]

전쟁에 의해 영토를 뺏고 뺏기면서 문화가 섞여 서로 전파 됨
예) 불교

당시 철제 솥이 없어 시루에 밥을 해 먹음
쌀은 귀족만 먹었음
김치는 백김치류 고추 없었음
간장, 된장, 젓갈 먹음
 # 어떻게 알지?

무덤 
고구려, 백제는 돌방
신라는 돌무지로 도굴이 어려움

불상명 규칙 : 재료, 지역 + 부처 이름 + 자세

고구려
추운지역으로 좌식생활
넓은 영토 확장은 중국의 혼란 상황이라 유리 (위촉오 -> 수 -> 당)
수,당과 60년간 전쟁 (강자들은 누가 센지 확인하려 싸운다)
# 아이들도 어른도 마찬가지
# 전쟁 -> 노획 -> 포상 -> 승진 -> 군대운영 -> 전쟁  악순환 사이클
700년 동안 무수히 많은 전쟁 경험

옷감은 여자들만 만들고
남자는 농사만 하고
둘다 귀해서 돈처럼 거래 
세금을 곡식과 옷감으로 냄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 1: 우리 역사가 시작되다




선사 시대 : 문자 기록 없다
역사 시대 : 문자 기록 있다

역사란? 오늘의 거울이요. 내일의 길잡이
역사 공부의 이유? 현 사회(나)를 알기 위해 역사(과거)를 알아야 한다

(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 구분의 유례
크리스티만 톰센 (박물관 관장)이 유물 전시를 고민하다 유물의 재료를 기준으로 분류

기원전 : 서기 전
기원후 : 서기 후
서기 : 서양 달력의 기원 (BC로 표기) 
기원 : 예수의 탄생 해
1세기: 1~100년 (예, 101~200은 2세기)

인류의 조상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300만년 전) 남쪽 원숭이
. 호모 하빌리스 (250만년 전) 도구를 쓰는 사람
. 호모 에렉투스 (50만년 전) 꼿꼿이 선 사람
. 호모 사피엔스 (20만년 전) 지혜로운 사람
.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 (3~4만년 전) 더 지혜로운 사람

석기
. 구석기 : 뗀석기 : 도구를 떼어 내 만들어
. 신석기 : 간석기 : 도구를 갈아서 만들어


구석기 (70만년 전~)

# 호모 하빌리스와 에렉투스 사람들
뗀석기. 불. 동굴거주. 채집과 사냥. 이동 생활. 벽화와 뼈조각품. 언어 사용
빙하기 시대(~1만년)가 살기 힘든 시기



신석기 (BC 8000년경)

빙하기 끝 : 큰 동물 죽고 작은동물. 따뜻. 숲 발달. 수면 상승
거주지 동굴에서 강가로 이동. 정책생활 시작의 다양한 유적 유물 있음

움집 : 깊이 판 이유는?
안에서 서서 생활. 높은 기둥 못 세움. 땅속은 여름은 시원 겨울은 따뜻. 바람 영향 적음

빗살무늬 토기 : 곡식 저장. 모래 땅에 세우기 편한
농사 목축 시작으로 안정적 식량.
빗살은 갈라짐 방지 (띄로 만들어 쌓아 올림)

배. 그물. 작살. 낚시바늘. 고래 상어 뼈 발견
. 다양한 수렵
#. 농사로 충분치 않았다?

가락바퀴 : 옷 만들어 입음

간석기 : 도구 재사용 가능으로 효율성 향상

예술품 : 조개가면. 얼굴 모양 토기
. 중요한 농사가 잘되길 하늘에 빈다
. 종교 시작
. 지도자는 아직 없어 평등사회



청동기 시대 (BC 2000년~)

청동 : 주석(강함) + 구리(약함) = 강해 짐
원래 구리색으로 황금에 가까우나 녹슬면 녹색으로 바뀜

고인돌 : 돌을 고여 놓았다는 뜻
. 윗돌 50톤 이상 * 10명/1톤 = 500명 * 4가족 = 부족원 2000명 이상 예상
. 인구가 많으니 많은 식량 필요해 전쟁, 제사 등 발생
. 지도자, 관리, 법 필요
. 계급사회의 시작

야산에 집을 지어 거주
. 강가 흙보다 농사가 더 쉽다

민무늬 토기
. 거주 장소와 기술 변화
. 야산의 땅에는 평평한 바닦
. 가마를 이용해 빗살 필요 없음, 더 단단

돌도끼, 돌낫 등
. 생활도구는 여전히 돌 사용


(#초기) 고조선 : BC 2333 ~

청동기 시대

단군신화 해석
.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선민사상) : 청동기 제조 기술 가져온
. 비, 바람, 구름 : 농경 중시 사회
. 사람이 된 곰과 결혼 : 곰을 믿는 부족의 여인과 결혼. 당시 부죽간 합병은 결혼 예상
.. 당시에는 강한 동물에 대한 토템 사상


단군왕검 = 제사장 + 통치자
. 대통령 같은 직책 
. 제사와 정치가 합쳐진 재정상황이

비파형 동검,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식 토기
. 고조선 영토를 가늠할 수 있음
. 중국 요하강, 송화강 인근까지 분포
. 이후 비파형에서 세형으로 바뀜

고조선 명칭 
. 고려 때 몽골 침입 당시 단결을 위해 역사서 편찬하며 단군 등장
. 조선 건국 시 정통성 강조를 위해 고(옛)조선을 뿌리로 한 국가임을 강조


(#후기) 고조선 : BC 194 ~ 108

중국(진-한 시대)인 위만이 철기 제작 기술과 주민을 대리고 고조선으로 옮

철기
. 단조 방식 : 두드리면서 불순물이 제거돼 더 강해짐. 칼, 농기구 등
. 주조 방식 : 거푸집에 넣어 모양만. 도끼, 솥 등 무거운 것
. 한반도에 철이 많이 나왔다
. 농기구 등이 철로 바뀌고 생산량 증대

법 : 범금8조
. 살인하면 사형 : 농사 중요, 노동력 귀중, 생명 존중
. 다치게하면 곡식으로 갚아라 : 상동, 사유재산 
. 도둑은 돈으로 갚고 노비가 된다 : 화폐, 신분제도 

고조선은 농기구, 무기 등의 '철기 발달'과 한나라와 다른나라의 '중계무역'으로 부강해짐

한나라(당시 로마모다 강했던) 공격에 지배층이 분열하여 멸망
이후 한사군으로 나눠짐 :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낭랑군)
낭랑군만 중국과 한반도의 중계 역할로 420년 정도 유지



부족사회

고조선 멸망 후 농사 짓기 좋고 철이 많은 환경으로 많은 부족으로 나눠짐

# 북쪽에서 남쪽으로 순서대로 나열 : 3등분으로 구분

. 부여 : 송하강 인근, 들판, 목축-농사, 왕-가(저,구,우,마: 윷놀이), 순장, 금 세공
. 고구려 : 압록강 인근, 산, 전쟁-농사, 왕-제가회의, 데릴사위제

. 옥저 : 바닷가, 해산물-농사, 군장, 민며느리제, 가족공동묘
. 동예 : 바닷가, 해산물-농사, 군장, 

삼한 : 약 78개 부족을 통틀어 지칭. 나라가 아님
. 마한 : 54, 벼농사, 군장
. 진한 : 12, 벼농사, 군장
. 변한 : 12, 벼농사, 군장

군장 : 부족장

솟대
. 새는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신성한 동물
.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소도)을 표시
. 삼한 지역이 분포
. 정치와 종교의 분리

제천행사
. 백성들의 통합을 위해 매년 개최
. 부여 : 12월. 영고(북을 울리며 신을 맞이 한다). 사냥 성공기원
. 고구려 : 10월. 동맹
. 동예 : 10월. 무천(하늘을 향해 춤춘다)
. 삼한 : 5,10월 (파종과 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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