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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5대. 1095(42세) ~ 1105)
※ 제주도 편입 (1105)
. 물 건너에 있는 큰 고을이란 뜻
. 그전까지는 별도의 나라 '탐라'
무신정변 (1170~1258) : 무신이 정치적 변을 일으키다
. 권력 장악 후 욕심은 문신보다 더 하고 머리는 문신보다 덜 해
. 백성은 힘들고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줄줄이 서로 죽이며 권력이 옴겨 감
. 마지막이 최충헌 4대에 걸쳐 60년간 집권
. 최충헌은 봉사 10조를 이용해 도방, 교정도감(#현 국정원) 설치하여 집권 강화
. 최우는 정방(인사 결정권), 마별초 야별초 등을 설치하여 지속적 집권
※ 도방 : 무신 보디가드 군대
※ 마별초. 야별초는 도방을 세분화, 전문화하여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
. 마별초 : 말을 타는 특수 부대
. 야별초 : 밤에 활동하는 특수 부대
망이망소이 난 (1176~1178)
. 정중부 집권시기
. 명학소 사람들 주도의 농민 봉기
※ 명학소 : 향-소-부곡 중 하나로 난 등으로 차차 없어짐
난(봉기:)이 잦은 이유
. 살기도 어려웠는데 무신들의 난으로 엄격한 신분제가 무너진 것을 지켜보고 수시로 잃어남
※ 봉기 : 벌 때 같이 들고 일어난다.
김사미, 효심의 난 (1193~1195)
. 이의민 집권시기
. 농민 봉기
만적 (1198)
. 최충헌 집권시기
. 노비봉기
※ 노비 : 노(남)비(여) 여자가 더 비쌌다. 출산 가능한 사람이기 때문
몽골 전쟁 (1231 ~ 1259)
. 몽골 : 칭기스칸 50년만에 대제국 건설
. 몽골과는 적절히 관계를 맺고 그게 간섭없어 적절히 조공하던 중
. 몽골 사신이 돌아가다 죽은 것을 이유로 침략했는데 져서 강화를 맺음
. 이후 최우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나 내륙의 백성들은 몽골에 의해 짖밟힘
피해상황
. 백성 매년 20만명 끌려감
. 문화제 소실
. 재산 피해 막대
처인성 전투 (1232년 12월. 경기도 용인)
. 백성이 스스로를 지키려고 전투에 참여
. 승려 김윤후 이끔
# 이후 처인성 사례를 바탕으로 백성 스스로 저항하는 것이 생기지 않았나?
최의를 제거하고 몽골과 강화를 맺기 위해 태자를 보내는 와 중 뭉케칸이 사망
후계자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
아릭부테와 쿠빌라이 간의 다툼이 발생
태자(원종 24대)는 당시 상황이 불리한 쿠빌라이를 찾아가 신뢰를 받고 고려의 불가침 약속을 받음
몽골 전쟁 마무리 됨 (1259)
팔만대장경 (1236 ~ 1251, 16년)
. 초고 대장경 불타서 몽골 침입을 막고자하는 기원
원종 (24대. 1259(40세) ~ 1274)
삼별초 (1269~1273)
. 야별초(좌별초 + 우별초) + 신이군 (몽골과 전쟁 중 포로가 되었다 탈출한 병사) # 구별한 이유는 뭘까? 차별?
. 초기에는 최씨 정권의 보디가스 역할의 조직
. 후기에는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역할
. 원종의 해산 명력에 불복하며 진도 중심으로 별도의 나라를 세움 (지금 전라도 지역 일부까지 확장)
. 세력이 커지자 원의 도움을 청해 해결
# 몽골과 원종의 연합에 자신들의 살길이 없어 항복하지 않음을 명분으로 버틴 듯
삼국유사(1281. 충렬왕) vs 삼국사기(1145. 인종)
삼국유사 : 저자 일연. 개인 저서. 백성에게 자부심과 희망주려 제작. 정치,권력,외교+이야기(신화,전설,백성,불교,향가). 예로 부터 전해오는 일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국가 저서. 지배층의 단결을 위해 제작. 정치,전쟁,외교의 사실위주. 유교 중심
불교
. 원당 : 위패를 모시는 절
. 불화 : 원당 발달로 불화도 발달
.. 물감을 뒷명에 발라 비치도록 만듬
.. 앞면의 그림은 선이 일정
.. 기계로 재현 불가
.. 금가루 사용
. 사경 : 불교, 경전을 손으로 베껴 쓰는 것. 신성한 행동으로 여겨 제작
원(몽골) 간섭기 (1258~)
.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설치
. 태자와 원 공주 결혼
. 태자는 일정기간 원에서 지내다 와야 했음
. 당시 왕들은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이름에 '충'자가 들어 감 (25대 충열왕 ~ 30대 충정왕)
충선왕 (26대. 1298(24세) ~ 1313 )
. 대부분 원에 머물며 고려에는 잘 안감
. 원에 과거를 제안하기도 함
. 만권당 (개인 도서관)에서 학자 교류 유도하여 고려에 성리학이 적극적으로 유입되는 계기
당시 원나라의 영향으로 유학파 많았다.
출세의 지름길 # 지금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와 비슷한 듯
이슬람 등 외래 문화와의 교류로 세계관 넓어짐
이색 (1328 ~ 1396)
이성계 ( 1335 ~ 1408 )
. 쌍성총관부 지역 출신 (변방 출신)
. 홍건적, 왜구, 여진족, 원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영웅
. 황산 대첩 (1380)
공민왕 (31대. 1351(22세) ~ 1374)
. 왕이 되기 위해 원의 노국공주와 결혼
. 그런데 사랑하게 됨
. 고려의 왕권은 약했다.
.. 재상회의인 '도평의사사'에서 중요한 결정은 모두 하고'
.. 정방에서 인사권 모두 결정 하고
.. 부원세력(원 추종)이 원을 등에 업고 득세 (홍씨, 기씨-기황후 등)
.. 권문세족(권력있는 집안, 세력있는 족속)이 득세
. 왕권강화 시행
. 정방 폐지
. 몽골 풍습 금지
. 숙청
. 쌍성총관부, 정동행성 이문소 없앰
.. 당시 원은 홍건적의 난 등 반란과 질병으로 정신 없었음. ㅎㅎ
※ 몽골 풍습
. 족두리, 연지곤지
. 언어 : 마마. 수라. 무수리. 마누라. 00치
. 위기
.. 홍건적 침입
.. 기존 세력의 저항
... 자객
... 몽골군 투입
... 반란 등등
.. 노국공주의 죽음
... 개혁 의지를 잃어 현 권력과 관계가 없어 보인 신돈에게 권한을 주다 시피 함
신돈 ( ~ 1371)
.. 전민변정도감 시행 (1366) : 땅을 백성에게 노비를 양민으로
.. 성균관을 통해 신진 사대부를 양성하여 개혁을 강화하려 했으나 불교 불신으로 균열
.. 기존 세력(권문+부원)의 방해
.. 신돈 처형되고 개혁은 물건너 감
※. 안동 축제의 '놋다리 밟기'는 '홍건적의 난'때 왕과 공주가 안동까지 도망친 사연으로 만들어짐
최무선 (1362 ~ 1395)
. 화약과 관련 무기 개발
. 1377년 화통도감 만들고 총 책임자로 임명
. 1380년 진포 대첩에서 최초의 함포 해전으로 500대를 100대로 승리
. 1389년 대마도 공격 왜구 침입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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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방향 |
표현 |
그림 |
의미 |
동 |
해 |
세발 까마귀 |
|
서 |
달 |
두꺼비 옥토끼, 계수나무 |
복 불사 신화 관련 |
남 |
|
|
현세/무병/장수 |
북 |
|
|
내세/불사 |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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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시대 구분의 종류
사용 도구 기준 |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
철기 |
문자 사용 기준 |
선사 시대 |
|
역사 시대 |
|
먹거리 기준 |
수렵과 채집 |
농경과 목축 |
|
|
사회 형태 기준 |
원시 무리 |
모계 씨족 |
부계 씨족 |
|
# 년도는 계속 논의 중으로 확실한 것은 없는 듯 대약으로 이해, 국내는 별도로 정리 필요할 듯
전기 구석기 : BC 2,500,000년 ~ 200,000년
후기 구석기 : BC 40,000년
신석기 : BC 8,000년 ~
청동기 시대 : 그리스 BC 3,000년, 중국 BC 1,800년 (한국 2,000년)
철기 : BC 1,500년 (한국은 BC 300년)
이뉴잇 마을의 노래 대결
- 노래를 부르는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 효과로 분을 풀어 냄
2002년
[청동기 시대 시대상]
재기 등의 유물을 통해 농경 사회와 농사의 중요성 알 수 있음
족장과 무당이 농사에 중요한 날씨에 책임을 지는 사회
좋지 않을 시에 죽음을 당할 수 있었음
그래서 열심히 천문을 관측하고 안내했을 것임
과학적 농사 기법 도입
- 이랑 사용
- 이삭을 따던 돌칼에서 포기로 자르는 돌낫으로
- 절구와 키 사용하여 낱알을 고름
- 다락 창고로 오래 저장
- 수로 시설로 치수
고기잡이
- 통나무 안을 파낸 배 이용
- 고래를 집단으로 사냥
사냥에서 목축으로 자연 통조림
농한기에는 사냥도 병행
청동은 1,083도씨에서 녹는다
그래서 도가니 + 숯 + 풀무 등의 기술이 필수적
[고조선]
예상 :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
집
- 들보, 서까래, 온돌, 이용 공간의 분할(방, 부엌 등)
음식
- 곡물을 으깨 반죽을 만들어 시루로 쪄서 먹음 : 가마솥 필수
- 소금 사용 (암염, 해조류 이용 수집)
- 음식은 썩어 없어져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늪이 흙으로 변한 화장실 토양을 이용해 식생활 파악
토기
- 민무늬 : 점차 사라짐
- 후기에는 아가리에 띠 생김
옷
- 멋 부림 : 생존을 벗어난 여유
- 비단, 베, 가죽 신과 모자, 귀걸이. 옥 단추, 청동 허리띄
권력 사회
- 제천행사로 춤과 노래를 불러 협동과 단결 강화
- 종, 방울 등의 제기 소리로 희망, 성스러움을 강조
- 고인돌로 대내외 위엄 과시 (높은 곳에, 크게~)
-- 가족 무덤도 있었다.
제기 등의 무늬
- 동심원과 삼각은 번개, 별, 태양, 빛 등을 나타내며
- 강력함 힘을 상징
- 동심원 등 무늬를 촘촘히 세기면 넣으면 빛이 사방으로 잘 퍼지는 효과
- '8'은 확대와 풍요 상징 (사방 팔방)
청동기 칼
- 3등분 구조, #왜?
- 피 흐르는 홈 #왜? 찌른 후 쉽게 뺄 수 있는 실용성 추가
- 비파형 동검 # 왜 비파형이지?
- 비파형, 3등분 조립식 등은 중국과 다른 민족성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었다.
- 비파형은 상처를 크게 내어 살상력 증가
- 검날의 돌기와 조립식 구조는 부러짐 방지
국가
- 법, 문자, 관료, 도성이 나타남
교류
- 남은 자원의 교환 시작
- 말, 배
- 화폐는 중국의 칼모양의 쇠(명도전) 사용
# 쇠가 귀해서 사용했을 것. 그런데 왜 칼모양?
무덤 (발전 순서대로)
- 고인돌 : 돌
- 돌널 무덤 : 돌판+돌
- 돌돌림 무덤 : 돌 + 나무관
- 널 무덤 : 나무관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듬),
-- 관 밑에 유물을 넣어 묻음
#왜 밑이지? 옆이 아니고?
단국신화
- 부(천상)와 모(곰)가 모두 신과 직접 관련 있는 뼈대 있는 나라
- 당시는 하늘과 곰은 신성시 되었다.
- 두 집단의 결합을 의미한다. 아마 천상은 이주민, 곰은 토착민 예상
- 단군(제사)+왕검(정치)를 뜻하며 재정일치사회 : 왕이 곧 신과 연결되어 있다
#추후 불교의 국교화와도 연결 가능
고인돌
- 거석문화 중 세계 고인돌의 40%가 한국 보유
- 농경이 위주가 되어 정책 사회로 바뀌면서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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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918~943 재위)
왕건 강화 정책 시행
- '본관'과 '성씨' 사용 적극적 권장
조상이 살던 지역을 국가에서 인정하여 지역에 대한 자부심 높임
신라시대에 있었는데 고려의 지방세력 포용과 안정을 위해 적극적 사용
#이미 있었던 것을 강화하여 효과를 본 것으로 보임. 새로운 것 이었다면 효과가 없었을 것
- 29명과 결혼 : 지방 세력가의 딸들과 결혼
- '왕'씨 하사 : 같은 왕족이라 생각하게
- 사심관 : 수도에서 지역의 일을 살펴보는 관리로 지역 세력가를 임명. 신라 경순왕이 경주 사심관으로
- 기인 : 사심관과 비슷한데 지역 세력가의 아들을 임명하여 수도에 둠 (인질)
- 백성 세금 감면
- 불교 장려
기타
- 축성으로 외적 대비
- 외래 문화 정보를 적극적으로 교류
- 왕건이 죽는 해에 [훈요10조] (943)를 남겨 아들 혜종에게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조언을 남김
종합적으로 귀족이 아니어도 인정 받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함
그래서 고려문화는 다양성이 매우 높다.
# 문화 발전에 큰 기여!!
혜종 (이름 왕무. 912년 탄생, 2대. 943~945 재위)
왕건의 맏아들이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지방세력이 많아 단명 (자객도 보냈다는...)
정종 (3대. 954~948 재위)
불교 적극 참여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수도를 강한 친척이 있는 개경에서 옮겼으나 단명
광종 (4대. 945~975 재위)
왕권 강화 정책
- 노비 안검법(956) : 억울한 노비를 풀어주는 법 : 군사와 노동력을 줄여 세력 약화
- 과거제도 (958) : 기존에는 집안이었는데 이제는 실력에 따라 인재 발탁
-> 추후 유학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어 유학이 차차 정치의 교과서로 자리매김
- 공복색 : 관리가 조정해 나갈 때 입는 옷의 색깔을 계급에 따라 구분 -> 서열화
자주-적-주황-초록
상기 제도로 집안보다 벼슬이 중요하게 만듬
- 황제의 나라 : 독자연호(광덕, 준풍), 태자, 태후, 묘호(조,종) 등 황제의 격식에 준하게 변경
기타 평가
- 잔혹한 폭군 : 왕권을 잡은 후 말 안 들으면 즉결 처분하는 왕
경종 (5대. 975~981 재위)
신하들을 다독이는 정치,
신하 왕선을 준용했으나 등 돌려 망한 듯
성종 (6대. 981~997 재위)
신하들과 함께하는 정치.
최승로의 [시무28조] (982)
나라의 기틀을 잡는 정책
- 기관 : 중서문화성 (정책을 세우고), 상서성(정책을 실행하고), 중추원, 이사대, 삼사 등
- 지역 관리 직접 파견 관리
- 교육 : 국자감(종합대학으로 관리 양성), 지역에 학교 마련
993년
거란 1차 침략 #(~993년)#언제까지 전쟁 했을까? 1년 이내 전쟁인 것 같다.
송을 치기 위해서 연합이 신경 쓰이는 고려를 치기 위해 거란 침입
서희가 협상하러 나가 거란의 의중을 잃고 불가침 조약과 강동 6주를 손에 넣음
(압록강 동쪽 6개의 성으로 개경으로 통하는 길목이고 송-거란-여진 등과 무역하기 좋은 교통의 요충지)
목종 (997~1009 재위)
현종 (8대. 1009~1031 재위)
1010년
거란 2차 침략 #(~1010년 예상)
1~3차 거란 전쟁으로 고려의 위상은 국제적으로 높아짐
당시 송, 거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두루 친하게 지내며 교류할 수 있는 위치를 만듬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함
문종 (11대, 1046~1083)
최충 (984~1068)
최초의 사람학교 설립, 합격자가 많자 개경에 12개 학교 개교하여 '사학 12도'로 불림
1071
송나라 국교 회복
의천 (문종의 넷째. 1055~1101)
- 1065 승려가 되다 (당시 승려는 높은 지위를 가짐. #선망 직업)
- 천태종 개창하고 불교 통합 노력
- 화폐(해동통보) 건의하여 시행.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
불교 문화
- 개경에만 절이 800여곳이었고
- 과거공부, 숙박, 기도, 장례, 시장, 고리업 등을 하고 있어
-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 대장경 : 불교의 백과사전으로 보유 여부가 국가의 불교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
-- '송'에 의해 '초조 대장경'을 '거란'에 의해 '재조 대장경'(팔만대장경)을 만들 수 있었음
숙종 (15대, 1095~1105)
1104.2
고려군 완옌부가 이끄는 여진족(말갈의 후예)에 패배
거란과의 전쟁 후 100년이 흘러 태평하여 전투력 약화
1104.12
윤관이 별무반 조직 : 기병, 보병, 승병, 특수부대로 17만명
예종 (16대, 1105~1122, 17년 재위)
1107
윤관 여진 땅 정벌하여 얻은 땅에 동북 9성 축성
그러나 정예가 아닌 지방군에 대한 승리
승리 후 지리를 잘 몰라 서로 연락이 안돼 물자 이동이 어려움
많은 수의 군사를 유지하기 위한 물자가 부족하고 국내 노동력 부족
1109
거란이 부담스런 여진이 고려에 먼저 불가침 제안
동북9성을 돌려주고 서약
이후 여진은 금을 세워 '거란'과 '송'을 치고도 고려를 공격하지 않음
(송은 폐배 후 강 아래도 내려가 남송이 됨)
인종 (17대, 1122~1146, 24년 재위)
- '송'을 멀리하고 '금'을 가까이 : 약자는 멀리 강자는 가까이. 실리 외교
- 검소하게 생활하며 사치금지
- 백성 보살 핌 : 지방에 농사를 위한 관리 보내고 병든 백성을 위한 물자 지원
- 삼국사기 제작
- 효과는 크기 않았지만 노력한 군주
1122
인종 14살에 재위
외할아버지 이자겸이 경쟁자 제거하고 딸을 왕비로 보내 왕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됨 #권력 집착!!
1126
이자겸의 난
성장한 인종이 이자겸을 없애려 하다 척준경(여진과의 싸움에서 영웅이 된 무장)에 의해 실패
이자겸은 관련자를 모두 숙청한 사건
이후 인종은 권력에 눈먼 척준경을 포섭하여 이자겸을 제거하고 둘 다 유배 시킴
(영광 굴비 이야기)
1135
묘청의 난
인종은 인재를 찾다 유행하는 풍수도창(풍수지리와 미래예언의 도참)을 한다는 묘청을 만남
묘청은 서경 천도를 하면 금이 항복한다는 예언을 함
그러나 자신을 따르는 세력이 서경에 있어 그리고 수도를 옮기려 한 듯
뜻대로 되지 않자 서경에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반란
김부식이 성을 포위하고 물자를 끊어 1년간 장기전으로 대응 쉽게 제압
1145
인종의 지시로 역사를 통해 교훈으로 삼도록 하기 위해 김부식 삼국사기를 편찬
# 김부식은 문무에 모두 뛰어난 건가?
고려의 문화
계급사회
- 최고 지배층, 중간 지배층, 농민(백정), 특수지역사람, 천인(노비 등)
- 18등급으로 나눠 구분, 서로 간에 혼인으로 '문벌' 이룸
- 과거나 음서를 통해 관직에 입문. 대부분 명예 때문에 과거를 통해 들어가려 함
- 무신, 문신 구분
지방관리
- 지방관은 30개월 단위로 순환 근무
-- 주현 > 속혁 > 향소 부곡
-- 각 지역(본관)에서 공을 세우는 인물이 나오면 승격되고 죄가 있으면 낮아 진다) # 본관이 중요해 진 것
-- 실제적으로 지방 세력가(향리 : 호장>부호장)가 지방을 관리
#지방자치제?
월급
- 녹봉 : 1년에 2번 곡식으로 받음
- 전시과 : 땅을 주고 거기서 나온 곡식의 일부를 받아감
가족 (아들 딸 관련)
- 장가간다 (장인댁에 간다)
- 태어난 순으로 족보를 올림
- 결혼해도 친가의 유산은 딸 개인의 것
위 3가지가 조선 후기 때 바뀜
- 유산 동일 분할
- 부모도 제사도 번갈아 가며 모심
연등회 : 2월 보름 개최. 복을 빈다.
팔관회 : 10월 혹은 11월 보름 개최. 전통신앙과 불교 행사를 함께하는 축제
- 외국인의 참여가 가능하여 '코레아'전파 기여
- 지역적 특성에 따라 믿는 '신' 존중
#지역 민심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듯
둘 다 신라시대부터 있었음.
벽란도 : 예상강 하구, 개경에서 말로 몇시간 거리로 송, 일본, 아라비아 교류 창구
거란과 전쟁 후 송과의 비공식적 교류 장소 (민간 외교관)
교류물건
- 송->고려 : 금은그릇, 차, 초, 약재, 책 등
- 고려 -> 송 : 금은그릇, 비단, 먹, 활과 화살, 말, 칼, 인삼, 책 등
# 무기를 수출한 나라?
책으로 의술, 불경, 유학 등 다양한 문화 교류가 가능해짐
청자
- 송나라에서 들어와 발전시킴
- 비색 (푸를 빛), 상감 (일부를 파내고 다른 재료를 넣어 무늬를 만듬)
#활발한 교류 환경이 다양성으로 다양성이 문화 발전으로 문화 발전이 국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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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발해의 역사
분홍색 후삼국 시대 역사
통일신라 이야기
642년
백재 의자왕 신라 대야성 공격으로 전쟁시작
힘이 약한 신라는 선덕여왕의 지시로 김춘추가 고구려에 도움 요청
648년
거절당해 당나라로 구원요청 감
# 6년이나 돌아다니며 협상 과거의 시간은 매우 천천히 흐른다.
654년
신라의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태종무열왕, 654~661)가 왕이 됨
660년
나당연합으로 전쟁 다시 시작
갑작스런 공격에 백제 패망
황산벌 전투에서 5천대 5만 승부
계백은 출정 전 죽음을 각오하고 가족을 모두 죽이고 출전했다는
667년
나당과 고구려 싸움
연계소문이 죽고 아들들(남생, 남건, 남산)이 이간질에 당해 내부에서 스스로 문을 열고 망함
668년
고구려 패망
고구려, 백재 둘 다 망한 뒤에도 항쟁은 몇년간 지속됨
당나라가 안동도호부, 웅진도독부, 계림도독부를 세우고 통일된 신라를 먹으려 함
멸망한 고구려인은 '영주'로 강제 이주시켜 다시 뭉치지 못하게 함
670년
신라가 백제 땅의 당나라(웅진도독부)를 공격
매소성, 기벌포 등에서 당과 신라는 계속 싸워서 물리침
676년
문무왕 (661~681)에 의해 통일 신라 시작
통일신라의 의미는 과거와 달리 하나의 '단일민족'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계기를 만듬
죽은 후 동해 바다에 묻혀 용이돼 나라를 지키고자 바다의 바위에 안장하는 유언
신문왕 (문무왕 아들, 681 ~ 692)
문무왕에 감사하여 감은사를 세웠다.
만파식적 : 만개의 파도를 가라 앉히는 피리. 평화로운 세상임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
왕권강화
9주 5소경으로 지방을 다스릴 체계 만듬 (9주는 현재의 도 개념, 소경은 작은 수도 현재의 특별시?)
소경에 신라 귀족이나 왕족을 이주 시킴
국학에서 지방 관리자 교육 시킴. # 과거 학교
녹읍 폐지 : 세금을 나라에서 걷고 관리에세 지급. 기존에 관리가 걷어 나라에 납부
696년경
'영주'는 거란, 말갈, 고려인이 함께 거주하였고 당 관리에게 힘든 삶을 살았음
거란 이진충이 반란을 하였으나 곧 평정
이틈에 고구려 '걸걸중상'과 말갈 '걸사비우'는 탈출하여 요동으로 이동
이동 중 전쟁으로 둘 다 죽고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무리(고려+말갈)를 이끔
698년
동모산에 머물며 돌궐과 손잡고 '진'을 세움
고왕, '발해군왕' 칭호와 '발해'로 알려짐
남북국시대 시작
돌굴 (551~747) 당나라를 위협하는 나라로 터키의 선조
702년
33대 성덕왕(~737년) 신문왕의 둘째, 효소왕의 친동생
정전 시행 : 15세 이상 땅 없는 남자에게 땅을 지급하여 세금 증대
# 귀족들에게 배분된 부를 민간으로 돌려 국가의 자금 확충
당나라와 화해 : 발해(698년)가 732년 당나라를 공격하여 신라에 도움 요청하여 관계 회복
- 신라방 : 당나라의 한인촌 (신라소 : 관청, 신라원 : 절)
- 유학 : 의상, 해초 등 승려 다수 유학 (해초의 왕오천축국전은 4년간 인도 여행기 기록 우리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데 보관은 프랑스에...)
- 빈공과 : 당의 외국인 채용 과거 시험으로 인재 부족으로 만든 시험으로 총70명 합격자 중 신라인 58명
그 중에 18세 수석합격인 최치원 의뜸
# 어떤 환경이었기에 빈공과가 생겼을까?
울산항을 통해 세계와 교역 : 경주와 가까워 발달
당, 페르시아(무덤 무인상), 인도, 아라비아, 로마(유리그릇), 일본(먹, 숟가락) 등과 교역
수출 : 금 제품, 인상, 명주, 먹 등
수입 : 양탄자, 상아, 후추, 유황, 수은, 유리그릇 등
719년
2대 무왕 (~737)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
732년
흑수말갈을 손 보라고 보낸 동생 대문예가 당으로 도망치고 당은 나몰라라 해서 당나라와 전쟁 시작
산동 공격 승리하여 땅을 넓힘
737년
3대 문왕 (~793) 무왕의 아들
당의 선진 문화 받아들임 : 유교, 불교
상경용천부로 수도 이전 : 당의 장안을 참고한 계획도시
교역을 위해 수도로 통하는 길을 만듬
742년
33대 경덕왕(~765년) 성덕왕의 셋째
귀족세력의 부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
- 이후 150년간 20번의 왕이 바뀌며 망해감(혜공-선덕-원성-흥덕---)
751년
석굴암 제작 시작
20년 걸림
석굴은 인도의 양식으로 건조한 나라에 맞음 (인도, 중국은 약한 퇴적암의 돌을 파서 만들고 신라는 강한 화강암을 쌓아서 만들어 세계 유일의 석굴 양식)
# 입구에서 순서대로 지상 - 비도 - 천상
- 팔부신장상 : 8명의 신장(하늘의 장수)로 불법을 수호
- 사천왕상 : 동서남북 수호, 비도에 위치(하늘로 통하는 길)
- 인왕산 (금강역사상) : 문을 지키는 장수
- 십일면관음보살상 : 11개의 얼굴로 (수많은 사람들이 소원하는) 소리를 볼 수 있는 보살
- 10대제자상 : 십나한(덕과 지혜를 얻은 성자)
- 굴 : 문무왕릉과 연결되는 길
기타 인물
원효 (617~686) : 국내파(의상과 함께 유학가다 해골물로 깨달음). 불교 대중화 노력(노래 이용)
의상 (625~702) : 유학파(당나라), 부석사, 낙산사 세움. 사회통합 노력
장보고 (~846)
- 평민 출신으로 골품제도로 인해 출세할 수 없어 당으로 넘어가 군인이 됨. 당시 당나라는 민란이 많아 군사 부족
- 당나라에서 인정받고 있었으나 해적에 의해 노예로 팔려오는 신라인을 보고 흥덕왕에게 요청해 귀국
당시 신라는 왕권약화로 내부적 분열로 해적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음
- 828년 청해진을 세우고 군사력 키워 해적을 정리하고 군사력+조선 기술+항해 기술로 주변국과의 무역을 독점하다 시피함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흔들리는 왕족(신무왕)과 손잡고 계급 상승을 하려 했으나 귀족 반대로 841년 암살 당함
(당시 조선기술은 650년 뒤 콜롬버스의 배와 동일 사양으로 250톤을 선적할 수 있었다 함)
818년
10대 선왕 (830년)
가장 넓은 땅을 보유한 시대 (동-연해주, 서-요동, 남-대동강, 북-흑룡강) 신라의 3배에 달함
5경 15부 62주로 관리(요즘으로 치면 시, 도, 군/구 정도)
당나라 빈공과에 장원
해동성국이라 불림 : 바다 동쪽 번성한 나라
861년
48대 경문왕 (~875)
왕권의 약화와 귀족 세력 강화
귀족이 군대를 키우고 많은 돈이 필요해 땅과 세금을 무작위로 걷어 들임
많은 돈으로 사치와 향략을 일삼음
그에 비례하여 어려운 백성은 도적이 됨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못 듣는 귀를 가졌다는 의미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주인공이 됨
887년
51대 진성여왕 (~897)
889년 원종, 애노 농민 봉기, 역사상 첫 농민 봉기
최치원이 귀국해 시구10조 제안(내용은 전해지지 않음)
- 해운대의 '해운' 작명
- 해인사 묘길 상탑 제작 : 백성을 위로하는 탑
호족의 세력이 커져 후삼국시대를 열다.
호족
- 호: 세력이 강한 + 족 : 친한 무리
- 지방세력으로 골품제도로 출세할 수 없는 사람들로 제력 등을 갇춘 무리
- 선종 종파로 백성을 이끔(선종은 마음을 통해 부처가 되고 귀족이 믿는 '교종'은 글을 통해 부처가 된다)
선종의 영향으로 차 문화 전파
- 풍수리지설로 현재의 신라가 망할 운세라는 명분도 세움
도선 (풍수의 대가) 추후 왕건 설화에 등장 ^^
892년
견훤이 (후)백제 세움. 수도 완산주.
견훤은 신라의 군인으로 서해와 남해에서 공이 많았음
귀족의 폭정을 보고 봉기된 농민과 함께 백제 전통을 이어 나라를 세움
적극적 외교를 함 : 중국(오월, 후당), 일본, 거란
896년 빨간 바지 농민 봉기
900년경
왕위 다툼을 시작으로 흔들리기 시작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901년
궁예에 의해 고려(고구려의 줄임말, 후고구려) 세움. 수도 송악(개경).
궁예는 신라왕자 였으나 버려져 절에서 성장
신라에 대한 원한이 깊었음
농민 봉기 시 원주 양길의 군사와 함께 성장
왕건
무역부자 집안으로 궁예 편에서 장군으로 생활하며 영토 넓히는데 공을 세움
905년 궁예가 철원으로 수도를 이전하고 나라 이름도 마진, 태봉 등으로 바꾸고
"난 미륵불이다", "관심법으로 보겠다" 등 미친왕이 되어 나라를 위해 반역 함
(궁예에 대한 기록은 왕건을 위한 고려의 기록임 ^^;
아마 신라출신으로써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임)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워. 수도를 송악으로
926년
거란 공격 한 달 만에 발해 멸망
발해가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보는 이유
발해의 유적을 보면 고구려 문화와 유사, 지배층이 고구려인, 국제 문서 등의 표현도 고구려인
935년
- 문경을 울고 넘었다는 하늘재
- 지팡이 꼿아 나무가 되었다는 용문사 은행나무
- 승려가 되기 위해 머리를 깎았다는 금강산 단발령
936년
후백제 멸망. 45년 존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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