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5 (금) 09:13 오마이뉴스

"저 혼자였음 밤새 눈만 치웠을 겁니다"
[오마이뉴스 김시연 기자]100년만에 최대라는 춘삼월 폭설이 내린 4일 밤. 광화문 네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엉금엉금 기는 버스들을 뒤로 하고 모처럼 지하철로 퇴근했습니다.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었지만 지하철역을 나서는 순간부터 집에 오는 거리 곳곳엔 수북히 쌓인 눈을 치우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 눈을 치우고 난 뒤에 찍은 사진입니다. 아파트 소방도로 경사가 급해 눈을 치우지 않으면 빙판길로 변해 버립니다.
ⓒ2004 김시연
마포 달동네를 재개발해 지은 탓에 경사가 유난히 급한 우리 아파트까지 올라오면서 든 생각은 여기 쌓인 이 엄청난 눈은 누가 치울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사는 4동 진입로는 수북히 쌓인 눈이 고스란히 방치돼 있었고 덕분에 모처럼 아빠와 함께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만 신나게 놀고 있었습니다.

20cm 가까이 쌓인 눈밭을 헤치고 집안에 들어선 저는 갑자기 이날 낮에 도착하기로 한 택배 생각이 나 1층 경비실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경비실은 텅비어 있었고 입구엔 ''순찰중''이라는 팻말만 걸려있었습니다.

삽으로 눈을 북북 긁어대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습니다. 4동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5동에서부터 경비원 아저씨와 대여섯 명의 주민들이 소방도로에 쌓인 눈을 열심히 치우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냥 집으로 들어갈까도 생각했지만 빗자루를 든 채 눈을 치우고 있는 할머니와 여자아이까지 본 마당에 그냥 외면할 순 없었습니다.

별 수 없이(?) 그들 주변을 기웃거리던 전 마침 두툼한 장갑을 낀 채 넙죽한 나무 판대기로 힘겹게 눈을 길가로 밀어내고 있는 40대 아저씨를 발견하곤 다가갔습니다.

"많이 힘드시죠. 제가 할테니 좀 쉬세요."

처음엔 맨손에다 힘이 잔뜩 들어가 삽이 눈 위로 미끄러지기 일쑤였지만 조금씩 요령이 붙은 전 맨 앞에 나가 열심히 눈을 한쪽 길가로 밀어냈습니다. 그러면 곧 작은 삽을 든 어린아이, 빗자루를 든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뒤따르며 남은 눈을 마저 쓸어냈습니다. 반대쪽에선 삽을 든 경비원 아저씨와 제설용 플라스틱 삽을 든 30대 아저씨가 열심히 눈을 치워내고요.

조금 있으니 먼저 나무판대기를 건네 줬던 아저씨가 다시 자기 차례라며 임무 교대를 해줍니다. 그래서 이번엔 할머니에게서 싸리비를 건네 받아 눈을 쓸었습니다.

한 20여분 남짓 됐을까요. 길 복판에 수북히 쌓였던 눈이 어느새 자취를 감췄습니다.

▲ 눈이 깨끗이 치운 덕에 아침 빙판길은 면할 수 있게 됐습니다.
ⓒ2004 김시연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함께 힘을 모은 덕에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일을 끝냈다는 뿌듯함에 서로서로 자연스런 공치사를 나눴습니다. 평소 인사 없이 지내던 낯선 이들이었지만 이때만큼은 누구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었죠.

"아이고, 고맙습니다. 저 혼자였으면 오늘 밤새도 못 치웠을 겁니다."

가장 고마워했던 분은, 분홍색 수건을 목에 걸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치우던 경비원 아저씨였습니다. 이날 밤 당직이었을 이 분 혼자서 3개 동을 맡아야 했거든요.

제가 사는 곳은 공공임대아파트인 탓에 홀로 사는 노인분들이 특히 많습니다. 하지만 아파트가 높은 지대에 있는 탓에 이렇게 간밤에 내린 눈이 그대로 남아 빙판길이 돼버리면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꼼짝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날 밤 이들의 작은 수고가 없었다면 다음날 더 많은 분들이 고생했겠죠.

어느 때보다 혼잡할 오늘 아침 출근길. 눈이 치워진 거리를 보며 전날 밤 그 눈을 치우느라 고생했을 우리 숨은 이웃들에게 작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김시연 기자 (sean@ohmynews.com)

저도 어제 밤에 집에 들어와 눈을 쓸었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어제의 느낌이 다시 살아나서 가져 왔습니다. ^^*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눈을 쓰는 이웃의 모습들 ^^*

노동의 의미를 아시는 분들 같았습니다.

저도 약간은 깨닮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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