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그램을 보셨나요? 그거 보고 눈물 질질 흘리며 ARS 누르러 전화통 붙잡는 경험을 해 보셨나요?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병석에 누운 사람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치료도 못 받는 사람들, 방송에서 나서서 도와주는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방송에서 참 좋은 일을 하고 있고, 그런 방송을 가진 우리 나라, 참 좋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혹시 이게 얼마나 잔인한 게임인지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만약 죽을 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덕분에 직장도 잃고, 오랜 병력에 치료비로 집도 날리고, 비가 샐 것 같은 좁고 낡은 셋방에 누웠다고 합시다.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여러분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겠습니까? 그것도 공중파 방송을 통해 전국에 "나 이렇게 비참해요" 알리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카메라는 잔인합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나와 내 가정의 온갖 처절한 모습을 담아, 그대로 전파에 띄워 전국으로 내보냅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내 삶이 아무리 궁상맞아도, 나는 그것을 남들에게 동정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 권리를 짖밟아버립니다. 그러잖아도 비참한 사람, 가능하면 더 비참하게, 가장 비참하게 보이게 하려 합니다. 왜 그럴까요? 더 많은 눈물을 짜내기 위해서입니다. 그건 또 왜 그럴까요? 그렇게 짜낸 눈물의 양은 성금의 양과 정비례하게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눈물 질질 흘리며 거기서 모종의 감동을 먹습니다. 도대체 이 빌어먹을 감동의 정체는 뭘까요? 그 감동에 못 이겨 전화기 버튼을 누르며, 우리는 한편으로는 내가 저 처지가 아니라는 데에 안도감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덜어내는 겁니다. 알 수 없는 죄책감? 그것의 정체는 뭘까요? 아담 이래로 인간이 가져온 원죄의식? 아닐 겁니다. 그 죄책감의 정체는 아마 우리가 ARS 후원 몇 푼으로 쉽게 떨쳐버리고 싶은 ''사회적 책임감''일 것입니다.

원래 그 분들, 국가에서 돌봐야 합니다. 더 이상 일할 수도 없는 사람들 돌보는 것은 사회의 책임입니다. 국가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국가''는 가진 자들의 위원회가 되어, 이런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장애인 최옥란씨가 견디다 견디다 못해 자살할 때 그 잘난 국가는 어디서 뭐하고 있었습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방송사가 나서서 저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저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저들을 그 밖의 어떤 방식으로 돌 볼 수 있을까요?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우리가 ARS를 누를 때, 여기서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윤리적 책임은, 졸지에 우리들의 덕성의 표현, 즉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선행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행이 아닙니다. 그것의 사회의 의무입니다. 국가가 마땅히 져야 할 의무를 져버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옵션으로 남겨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사회적 책임은 져버린 채, 그저 돈 몇 푼에 그 책임감을 덜어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선행에 스스로 감동까지 먹는 엽기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저들이 받아야 할 천형이며, 어쩔 수 없는 운명이며, 심지어는 저들이 무능한 탓이라고. 과연 그럴까요? 저들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저렇게 되리라고 미리 알았겠습니까? 저들이라고 실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 저런 처지로 떨어진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이 지금 보여주는 저 비참한 모습은 언제라도 우리 자신의 운명, 우리 자신의 천형, 심지어 우리 자신의 탓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사회입니다.

왜 민주노동당이냐구요? 이 빌어먹을 사회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 자전거 타고 다닐 때에 하던 일, 왜 우리는 자가용을 타고 다니도록 못 하는 걸까요?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방송을 통해 쇼를 해 가며 시민들의 자선 행위로 미뤄버리나요?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그러잖아도 비참한 모습을 한갓 카메라의 피사체로 만들어 버리나요? 눈물 펑펑 쏟는 이 감동의 드라마의 비인간성, 그 감동의 잔인성에 끝장을 내기 위해, 나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출처 - 친구 조경준홈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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