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는 벼라별 인간을 다 봅니다. ‘This is my girl friend’라는 영어와 함께 옆으로 화살표가 그려진 셔츠를 입은 청년, 서로 끌어 안고 난리굿을 하는 남녀, “임마 전화 받아”하는 휴대폰 수신음으로 남들을 놀라게 하는 아저씨 등등등.

어느 날 출근길에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옆 자리의 소리 때문에 깨고 말았습니다. 어떤 젊은 여자가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훈아(지훈이라고 해 둡시다), 엄마 오늘 교육 받으러 가는데 아빠 말 잘 듣고…어쩌구 저쩌구”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잠자던 사람이 깰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들렸겠지요? 아니, 지 아들이 지훈이면 지훈이고(아들은 나도 있어!), 남편이 집에 있으면 있는 거지(별 볼 일 없는 모양이네), 그리고 지가 교육을 받으면 받았지(생명보험 그런 건가?) 왜 남의 잠을 깨우고 그래?-이게 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기분으로 눈총을 쏘았지만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지훈아~. 사랑해” 그녀는 이 말을 하고 긴 통화를 끝냈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지만 일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다시 집에 전화를 건 그녀는 “김지훈! 너 왜 엄마 사랑한다고 안 했어?” 이러는 것이었어요.

나는 남들이 듣는 데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덜 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공중전화를 하는 사람은 절대로 시를 쓰지 않는(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요(어디서 읽은 문장인지 순전히 내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아이한테서 사랑한다는 항복을 받아낸 다음에야 그녀는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 넣더군요. 그 때 눈이 마주쳤는데, 어떤 눈이었느냐면 눈동자만 눈에 잘 띄는 무슨 토끼 같기도 하고 쥐 같기도 한 그런 눈이었어요. 그런 눈으로 빤히 쳐다보더군요. 도대체 왜 그래요? 뭐가 어디가 어때서? 이렇게 말하는 눈이었지요.

나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이번엔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화장을 시작한 겁니다. 거울을 보며 눈썹을 그리더니 빠빠빠빠 이러면서 쥐 잡아 먹은 듯 입에 색칠을 했습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못 마땅한 듯이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여자를 죽도록 미워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나에 대한 모욕이다, 모욕 당하는 기분을 참을 수 없다, 원래 여자의 화장이란 남(또는 남자)에게 보이려고 자신을 가꾸는 일일 텐데 이런 식이면 나는 남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게 되는 거다. 또 집에서는 대체 뭘 했기에, 얼마나 게으르면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느냐 이런 생각이지요.

아아, 그런데 나의 수난은 화장으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여유 있게 얼굴을 가꾼 그녀는 휴대폰을 다시 꺼내더니 뿅뿅뿅뿅 오락을 시작했습니다. 서른도 되지 않아 보이는 그녀, 미시의 멋과 힘을 충분히 아는 그녀, 내 아이는 톡톡 튀는 개성 만점의 인간으로 훌륭하게 키워야 한다고 믿는 그녀, 남들보다 나와 내 가족이 중요하고 사랑에는 부끄럼이 없다고 믿는 그녀. 환상적인 게 아니라 정말 환장적인 그녀였습니다. 내가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습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할까, 그런데 뭐가 문제냐, 남들에게 무슨 피해가 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지? 공중도덕이니 에티켓, 남에 대한 배려 이런 건 그녀에게 송아지 껌 씹는 소리에 불과할 텐데. 속에서 부글부글 울화가 끓고 드디어는 그녀를 죽여 버리고 싶은 맹렬한 살의를 느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자칫하면 큰일 내겠구나 하고 있는데 다행히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지하철에서 내렸습니다. 하마터면 내릴 곳을 지나칠 뻔했는지 그녀답게 환장적으로 남들을 밀치고 나갔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나는 그 날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여성 여러분, 젊은 여성 여러분, 개성이 톡톡 튀는 젊은 여성 여러분, 걸핏하면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는 여성 여러분, 제발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게 그런 짓 좀 그만 하십시오. 부탁입니다.

(2006년 10월 30일 www.자유칼럼.kr)

저는 이글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
어찌보면 과격하지만 해학적인면이 더 커보이더군요.
"남에게 피해가 되나요?" 라고 물으면 어떻하지?

어떻하긴요 어쩔 수 없죠. 이렇게 답해야죠.

"진짜 몰라? 모름말고...ㅉㅉ"

'죽이고 싶다는 맹렬한 살의' 같은과격한 대목은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의미는 아시잖아요?
그래도 신경 쓰이 신다고요?
혹?

당신도 환장녀 인가요?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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