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서 내려와 진정한 영웅이 된 힐러리
1953년 최초로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에 올랐던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Sir Edmund Hillary)이 지난 1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88세. 그의 첫 등정 이후 수많은 후배들이 에베레스트와 그 형제봉을 오르다 숨진 사고를 생각하면 참으로 복되게 장수를 누린 셈입니다.

힐러리가 눈을 감던 날 뉴질랜드 정부는 헬렌 클라크 총리의 애도 성명에 이어 조기를 게양하고 국장을 발표했습니다. 경기장에선 그를 추모하는 묵념이, 동상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헌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도 이날 고인을 추모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영국은 에베레스트와 힐러리와 관련해 남다른 사연을 가진 나라입니다.

인도를 식민 통치하던 영국은 1850년 전후 히말라야 연봉의 고도와 위치에 대한 측량을 실시했습니다. 측량 결과 이전까지 최고봉으로 알려졌던 칸첸중가보다 ‘피크 15’라고 불리는 봉우리가 더 높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그 봉우리에 측량국 책임자였던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때부터 에베레스트는 현지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던 티베트 이름 ‘초모랑마(세상의 어머니)’, 네팔 이름 ‘사가르마타(하늘의 이마)’를 제치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 산사나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영국인들은 1900년대 초기에 벌써 산악회를 조직해 에베레스트 원정의 꿈을 키웠습니다. 현지의 폐쇄적 정책에 막혀 있던 영국산악회의 에베레스트 탐사는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이후로 영국원정대는 8차에 걸쳐 루트 개발과 정상 도전에 나섰으나 많은 희생자를 내며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1953년 5월 존 헌트 대장이 이끈 영국 9차 원정대의 1차 공격조는 정상을 불과 457m를 남겨둔 채 아쉽게 후퇴해야 했습니다. 강풍과 산소 부족, 피로가 겹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틀 뒤인 29일 2차 공격조가 마침내 10여m의 깎아지른 빙벽을 타고 올라 정상 정복에 성공했습니다. 바로 뉴질랜드인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가 이룬 쾌거였습니다.

영국원정대의 에베레스트 첫 등정 뉴스는 나흘 후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열리던 6월 2일 런던으로 전해져 경축 분위기를 더했습니다. 여왕은 힐러리에게 기사 작위를 하사했습니다. 텐징에게도 조지 훈장이 수여됐습니다.

영국으로서는 그가 영연방 뉴질랜드인이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웠을 것입니다. 영국인들이 힐러리에 앞서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가 설연 속에 사라진 조지 말로리를 진정한 산사나이로 추모하는 까닭도 첫 등정을 놓친 아쉬움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힐러리는 첫 에베레스트 등정이라는 명예를 팔아 한 평생 안락한 삶을 즐기지는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히말라야 연봉에 도전하고 남극을 횡단했으며 우주인 닐 암스트롱과 비행기로 북극점을 찾기도 했습니다. 1990년 칠순이 넘어서 아들 피터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재등정했으며, 지난해에는 87살의 나이로 손자와 함께 다시 남극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단숨에 세계적 명사가 됐지만 언제나 보통사람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양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서전 ‘정상으로부터의 조망(View from the summit)에는 “모험은 평범한 능력을 지닌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내가 그렇다. 꿈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썼습니다.

또한 히말라야 트러스트를 설립하고 셰르파들을 위한 학교와 병원을 건립하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그 일로 네팔에 함께 갔던 아내와 딸을 비행기 사고로 잃었지만 평생토록 모금활동을 벌이며 자선과 봉사의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힐러리의 명성은 에베레스트처럼 높은 곳에 오른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보통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랑의 실천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뉴질랜드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진정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뉴질랜드의 5달러짜리 지폐에는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젊은 시절의 힐러리 얼굴이 자랑스럽게 그려져 있습니다.

왠지 전율이 온다.

"모험은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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