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




상류층 자녀들은 책임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훈련하고, 어려서부터 구별 짓기와 탁월함을 몸에 익힌다.

그러는 동안 중산층에서는 야심, 자제력, 충동 억제 같은 다른 자질이 훈련된다. 독일 청소년 생활환경 연구에 따르면 상위 중산층의 부모는 외국어, 음악, 사회 참여 교육과 함께 아이에게 비판능력, 생태의식, 문화적 소양을 심어준다. 하위 중산층 가정은 근면성, 현실성, 준법성을 중심 태도로 가르치고 성공 지향과 물질적 가치에 초점을 둔다. 정중한 태도과 근면성은 격려되지만 사회적 날카로움과 비주류적 관심은 마뜩잖은 눈총을 받는다.

중산층 전체의 전형적인 아비투스는 성과 및 지위 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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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을 극복하는 법은 어렸을 때 배우는 게 가장 좋다. 안정적인 가정의 자녀들은 양육 과정에서부터 유리하다. 친구들과 종종 다툼이 있고 학교 성적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직접 경험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보는 기회를 얻는다.

거절 견디기, 실수 해결하기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히거나 일을 엉망으로 망쳤더라도, 스스로 돕는 법을 배우면 재앙으로부터 안전하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는 사사건건 간섭하는 헬리콥터 부모 대신, 고난을 견디고 그 속에서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여유로운 동행자가 필요하다. 어려움을 이겨내는능력이 없으면 예상되는 위험을 감수하지 못한다. 그러나 위험을감수하지 않으면 큰 성공은 기대할 수 없다. 캐나다 아이스하키계의 전설인 웨인 그레츠키(Wayne Gretzky)는 이런 말을 남겼다.

“쏘지 않으면, 명중 확률은 0퍼센트다."

2장 | 심리자본 어떻게 생각하고, 어디까지 상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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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상류층뿐 아니라 대부분의 자녀가 강하고 원만한 개성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는 자원, 즉 시간을 갖는다.

상류층은 젊은 중산층의 추격을 복잡한 심경으로 보면서도 자신의 기업을 위해 다양한 인재의 지식과 혁신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인적자원은 소수의 엘리트와 함께 대부분 중산층으로 구성된다. 한편, 전에는 종종 관례였던 것이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도 갑자기 중요해졌다. 계급 상승의 길을 열어주는 교육이 한 예다. 상류층과 상위 중산층에서 사립학교, 이중언어 수업, 음악 전문 고등학교, 미션스쿨로 향하는 급류가 증가한다. 부모는 몇 년 전보다 더 많이 자녀를 영국 기숙학교나 외국의 명문 대학에 보낸다. 그리하여 그들의 자녀는 개별적인 돌봄을 받을 뿐 아니라 일찍부터 일반 대중과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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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별되고 차별화 되는 것, 미래의 경쟁력!







 




이렇듯 선다는 것은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두 발로 서는 순간 걷기 시작한다. 발은 모든 땅과 안착되기를 열망하고 시선은 하늘 끝까지 가닿고 싶기 때문이다. 하여, 서면 걷는다. 아니 달린다. 아기들은 방향이 없다. 좌충우돌 사방팔방 마구 내달린다. 직립과 보행은 동의어다. 고로, 삶은 걷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단 일어선다. 그리고 걷는다. 걷기 위해서는 집을 나와야 한다. 그래야 걸을 수 있다. 자동차 지하철이건 비행기건 다 걷기 위한 수단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내가 오늘 내딛은 수많은 걸음들이다.

그리고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온 우주가 출렁인다. 나의 몸, 나의 발만이 아니라, 내 안의 미생물과 세균들, 오장육부, 온갖 상념들, 무의식의 흐름 등등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인다. 벚꽃이 흐드러진 남산을 산책하면서 내 신체는 다방면의 '케미'를 연출한다. 


1. 산다는 것ㅡ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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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아이처럼 행동할 줄 아는가를 말함이다.어린아이가 종일토록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조화가 지극하기때문이고 종일토록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이 저리지 않는 것은 그것이 본성과 합치되기 때문이고 종일토록 눈을 뜨고 보아도 깜빡이지않는 것은 집착하는 대상이 밖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길을 떠나도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머물러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며, 다른 사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물결치는 대로 함께 흘러가는 것이 생명을 보위하는 법칙이다. (안병주·전호근 옮김, 『장자』 3, 전통문화연구회, 2005, 311쪽)

생명을 보존하려면 자연의 이치와 천성을 알아야 한다. 갓난아기처럼 호흡하는 것, 사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 그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도다. 그 도를 터득하려면 알아야 한다. 길흉을 알고 멈춰야 할 때를 알고 자연의 속도와 리듬을 알아야 한다. 그 앎이 바로 생명의 원동력이다.

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해야 할 실천은 간단하다. “간절히궁금해하는 것"(운성스님, 명상-유튜브) 무엇에 대해 세계의 근원에 대해서, 존재의 심연에 대해서. 어떻게? "마음을 텅 비운 채 우주적 가능성으로!" 모든 배움의 기초가 질문인 것도 그 때문이다.양생을 잘 하려면? 몸과 우주의 이치에 대해 궁금해하라 구도자가되고 싶다면? 삶과 죽음의 원리에 대해 궁금해하라. 

1. 산다는 것ㅡ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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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세나디 왕 부처님 당시 북인도의 제국 중 하나인 코살라국의 왕-인용자)은 말년에 부인이 죽자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시골을 정처없이 돌아다니곤 했다. 어느 날은 멋진 늙은 나무들이 가득한 공원을 발견했다. 왕은 마차에서 내려 거대한 뿌리들 사이를 걷다가 이 나무들이 “신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을 알았다. "이 나무들은 고요했다. 어떤 시끄러운 목소리도 그들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상적인 세계로부터 떨어져, 잔혹한 삶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왕은 이 멋진 나무들을 보다가 바로 붓다를 떠올리고, 마차에 올라타 먼 길을 달려 이제여든의 노인이 된 붓다가 머물던 집을 찾아갔다. (암스트롱, 『축의 시대』, 487~488쪽)

2. 안다는 것ㅡ읽고 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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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고 낳고 낳고… 오직 낳을 뿐! 이것이 우주의 이치다. 초월자라 부르건 창조주라 부르건 아니면 빅뱅이라 부르건 우리의 우주는 오직 만물을 낳고 기를 뿐이다. 인간 또한 그렇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우주적 행위에 동참한다. 그것이 본성이고 생존의 법칙이다. 낳고 낳고 기르고 기르는 이 힘의 원천을 에로스라고 한다 그것은 남녀가 짝짓기를 통해 생명을 창조한다. 당연히 주체는 여성이다. 여성만이 낳을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아이 하나가 생긴다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순간 낳고 낳는 자연의 대순환에 참여한다는 의미도 있다. 아니, 그게 더 선차적이다.

여성이 '자신이 낳은 자녀를 원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들 신체의 타고난 창조력과 생명력을 경험하고, 자연에 충만한 살아 있는 힘을 자신의 몸에서 경험하고 싶은 욕구이다. 그들은 이 창조과정의 산물인 아이를 원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 자체도 원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을 창조적인 방식으로 조절해 왔다. 그러나 이 창조적 과정, 자연의 힘은 전적으로 그들의 통제 아래 있지 않고 어느 정도 길들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이론편_글쓰기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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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노자 등 인류의 위대한 멘토가 다 남성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시당초 이것은 차별이나 위계가 아니었다. 여성은 생식을 통해 우주와 소통하고, 남성은 가치의 생성을 통해 자연과 감응한다. 결국 여성이건 남성이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이것뿐이다. 생명을 낳거나 가치를 창조하거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간의 역사 속에서 둘다 어그러져 버렸다. 제국의 확장, 그리고 가부장제의 등장과 더불어 성적 불평등과 위계는 마치 보편적 원리처럼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남성은 가치를 창조하는 일과 멀어졌고, 여성은 생명을 낳는 것의 거룩한 의미를 망각해 버렸다. 성적 불평등이 거의 해소되었다는 우리 시대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고 재산을 일구는 행위를 하기는 하지만, 그게 과연 우주적 창조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고 있을까? 아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들이 그렇다. 생식은 오직 화폐와 상품의 회로에 잠식되었다. 출산은 의료산업 혹은 인구정책의 일환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생명을 낳고도 우주적 환희는 없다. 양육에 드는 돈, 감정소모, 경력단절 등이 여성들을 짓누른다. 그러니 임신과출산, 양육은 지독한 노동이거나 상처투성이일 수밖에. 남성들은 또 어떤가. 에로스는 한낱 쾌락의 수단이 되었을 뿐이다. 쾌락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쾌락은 오직 파괴를 향해 치달을 뿐이다. 

4. 쓴다는 것, 그 통쾌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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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한다. 행복은 즐거움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즐거움을 쫓아다닌다. 자본은 끝도 없이 즐거움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것을 좇다 보면 어느새 즐거움은 쾌감이 되고 중독이 된다. 중독이란 무엇일까. 황홀경에 빠지는 것. 황홀하다는 건 무엇인가. 정신을 놓고 무아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자아를 그렇게 고집하면서 또 그렇게 자신을 잊고 싶어 하다니,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일도 없다. 황홀경에 이르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독에서 약물로. 이것은 죽음충동의 코스다. 존 레논이 그랬다던가. 세상은 약물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맨정신으로 살기 어렵다는 뜻인가? 약물의 유혹이 얼마나 심했으면 저런 말을 했을까 싶다. 죽음충동이 아닌 생의 약동으로 황홀경에 도달하려면? 지성과 영성을 통해 자아를 해체하는 코스밖엔 없다. 근데, 그게 즐겁다고? 당연하다. 쾌감이 하나의 감각만이 극대화되는 것이라면, 이때의 기쁨은 온 존재에 퍼져 나가는 충만감이다. 그것을 일러 지복이라 부른다. 거기에는 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따라다닌다.

핵가족의 일상에서 웃음꽃이 사라진 지 오래다. 직장, 학교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웃음은 특별한 재능이 되었다. 

4. 쓴다는 것, 그 통쾌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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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웃음 하나 함께하지 않는 진리는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자!" (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48쪽)


4. 쓴다는 것, 그 통쾌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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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의학에서는 위생이 아닌 양생을 의술의 원리로 삼았다. “인체는 우주와 소통하는 창이 된다. 천지자연, 또 사계절의 절기, 60갑자 등 우주의 운행과 얼마나 소통할 수 있느냐가 신체의 능력이다."(고미숙, 『위생의 시대』, 북드라망, 2014, 86쪽) 병은 소통이 막힌 상태이며 병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병증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어느 부분이 막혀 있는지를 돌아보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만 하면 울화가 치미는 누군가가 있다면, 익숙하지 않은 타

2. 리뷰의 달인되기 : 텍스트와의 '활발발한 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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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얘(#아이, 아기)는 자기가 이런 사유를 담론화하지를 못해요. 의식 안에서 언어가 길이 나 있는 게 아니고 몸이 저절로 그렇게 표현할 뿐이에요. 그런데 얘가 좀 자라면 분별이 일어나겠죠. 펭귄 엄마를 봐도 인사를 할 생각이 안 들 거고,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게 놀까?"가 아니라 "오늘 또 숙제해야 돼”, 이러겠죠. 모든 인간이 이런 코스를 밟는데, 결국 그렇게 살다가 번뇌와 질병에 시달리게 되면 다시 그 본성을 되찾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너무 무겁고 뻣뻣해진 자아를 덜어 내고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다시 찾아가는 거죠. 다시 정리해 보면, 우리의 본성은 애초 유동적이고 탈주체적이다, 모든 사물과 공감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근데, 자라면서 문명적 배치에 포획됨으로써 공감이 아닌 단절, 유동성이 아닌 분별의 세계로 들어서는 거죠. 이 세계는 물질이 선차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이라 다들 소외와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럼 참 피곤하고 힘들어져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체의 능동성을 발휘하여 본래의 자리, 곧 유동성과 탈주체화의 경지를 터득해 가야 합니다. 철학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여기죠. 그런 점에서 철학이란 간단히 말해, 본성을 회복하는 인식과 사유의 지도라고 할 수 있어요.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실전편_대중지성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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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잖아요. 우리는 태양이 없으면 1초도 못 살아요. 근데 우리는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죠. 할 방법도 없구요. 옛사람들은 그런 무조건적 증여에 대해 깊이 사유를 했습니다. 그게 태양신을 섬긴 이유죠. 동네 산신령을 섬기는 것도 산이 있어야 먹고 산다는 걸 리얼하게 느꼈기 때문이죠. 이런 식으로 우리는 공짜로 얻는 게 너무 많아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근데 자본주의는 '돈이 돈을 낳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연과의 대칭적 연결고리가 끊어졌어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요. 오로지 손해와 박탈감만을 느낄 뿐이죠. 그러니까 벌어도 벌어도 불안하죠. 연결고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나는 스펙이나 재산하고 등가가 되어 버려요. 당연히 자존감이 떨어지죠. 공허하기도 하구요, 나란 존재가 결국은 화폐로 환원되니까요. 그래서 도박이나 성에 중독되거나 남들한테 갑질을 하는 겁니다. 스스로를 존중할 수 없을 때 폭력에 휩싸이는 법이거든요. 결국 소유와 쾌락을 중심으로 욕망을 추구하는데, 그 과정은 늘 분노의 화염에 휩싸이게 되는 그런 싸이클이 나오는 거죠.

그럼 이런 사슬을 끊으려면 욕망과 행동의 패턴을 다시 그려야겠죠. 고립과 단절이 아니라 대칭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욕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소유와 증식을 향해 나아갈 때, 쾌락의 무한질주를 하기 시작할 때가 문제인 거죠. 자본주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실전편_대중지성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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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초반에 몸이 안 좋아서 몇 년 동안 매주 서울 4대 명산을돌아가면서 등산을 했어요. 수락산, 관악산, 북한산, 도봉산 이런식으로 겨울 새벽에도 갔었어요. 그래서 저 때문에 많이들 끌려갔죠. 눈보라 칠 때도 가봤는데, 일단 산에 들어가면 너무 아늑해요.산 밑에선 우리가 다 조난당한 줄 알고 난리가 났는데, 정작 우리는 너무 편안했죠.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구경하는 사람이 무서운거예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더 고요할 수 있어요. 그걸 알고 나니까 악천후에도 거리낌없이 산에 오를 수 있더라구요.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실전편_대중지성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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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의 비결 2 : 사건의 현장, 사유의 탄생

간디의 수제자 중에 비노바 바베라는 인도의 성자가 있는데 그분이 여행에 대해서 한 멋있는 말이 있어요. 절대 돈을 갖고 다니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노잣돈이 풍부하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안 한다는 거야, 그냥 무엇이든 돈을 지불해서 사려고 한다는 거죠. 그분의 입장에선 이거는 여행을 한 게 아니야, 그냥 소비를 한 거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럼 돈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도움이 간절하겠죠. 그런 상태가 되어야 자아를 덜어 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순간 한없이 겸손해진다는 거죠. 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정말로 감사의 마음이 마구 솟아나죠. 비움과 감사, 이것을 훈련하는 게 바로 영성이라는 거죠.

요즘 시대에 돈 없이 여행을 하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분이 말씀하시는 바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죠? 말하자면, 자아를 덜어 내고 자의식을 비워야 스토리가 생깁니다. 사람을 만나면 일단 사건이 터지고 사건이 벌어지면 예상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정말 인생이 뜻대로 안 된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첫인상이나 고정관념 같은 것이 계속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만약 그걸 계속 고수하려고 하면 여행 자체는 하나마나입니다.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실전편_대중지성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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