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체험지도사 > 등산의 역사

 

강사 : 정갑수 (한국대학산악연맹)

 

2014.07.20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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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 말을 받아적은 거라 명칭이 조금 상의할 수 있음 ^^

 

알피니즘 : 눈과 얼음이 덮인 등산

 

등산의 역사는 도전과 극복의 역사

 

세계 대력별 고봉 이름

유럽 - 엘부르스

북미 - 메킨러

남극 - 빈스메쉬프

남미 - 안데스

아프리카 - 킬라만자로

아시아 - 에베레스트

오세아니아 - 칼스텐츠

 

 

황금시대

피크헌팅 - 등정주의

가이드 등반 -> 가이드리스 등반

 

은의시대

머메리즘 - 등로주의 - 신등정주의

벽등반

자아실현 목적

 

철의 시대

장비발달로 직등과 인공 등반

피톤리스 : 장비없이 등반

 

1890년 히말라야 등반시작, 각 대륙 고봉 등반

극지법 개발하여 캠프설치

히말라야는 1~2개월 소요 (고소증해소를 위해 고도를 차차 높여야 함)

 

1940년 다시 철의 시대

장비발달과 거벽 도전

 

1950년 거벽 중 북벽 도전

단독등반, 동계등반

 

1960년 클린 클라이밍

 

1970년 대규모 극지법 -> 소규모 경량 등정

알파인, 무산소, 속도등반 등

 

1980년 수퍼 알피니즘 : 고봉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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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등반 역사

 

1928년 동아일보 경신, 배재, 세브란스 학교 등산부

1937년 일반산악회, 고려대 산악회

1945년 한국 산악회

1962년 해외 정찰 원정

1970년 인수봉 등 루트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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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길다.

하지만 읽어 볼 만 하다.

사실인지 여부는 각자 알아서 판단



삶의향기 Lettering

since 2005

[양정훈의 <삶의 향기>]

#1491호 - 부러진 반민특위, 둥지튼 친일버섯.

간혹 사람들이 왜 상식으로 이야기 하는 세상이 그렇게도 오기 어려운 건지 의아해 할 때가 묻습니다. 아마 그 분들의 입장으로 바라본다면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대한민국 근 현대사를 통해 누가 권력을 유지하고 왔는지를 바라본다면 답은 의외로 쉽게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과거사 청산'이란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의 근현대사에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전국토와 국민이 짓밟힌 안타까운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리는 사람보다 더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친일파'입니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한 민족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동포를 짓밟고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찾아온 광복이지만, 역사는 그렇게 비용을 들이지 않은 민주주의를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지금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보수수구세력들이 과거사 청산에 노이로제 같은 반응으로 절대반대를 외치며(지금 역사교과서를 뉴라이트쪽으로 개정하자며 여론을 만들고 있지요) 여론을 조작하는 건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결국 지금 집권당의 전신은 근현대사 공부를 조금만 해보면 한나라당->신한국당->민자당->민정당->공화당->자유당 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유당의 전신은요? 바로 친일세력 아니겠습니까?

민족의 반역자를 단 한번도 제대로 처단하지 못했던 이 나라의 슬픈 역사. 그래서 광복은 했지만 홀로 서기인 '독립'은 진정 요원한 현실이 대한민국입니다. 그런 대한민국에게도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었으니 바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였습니다. 

민중들 스스로 개인 처단의 차원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움직임 이외에 국가가 주도적으로 친일파를 척결하려고 했던 건 반민특위가 유일했지요. 해방 이후 이승만과 김구의 입장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승만은 '단합과 단결'이라는 명분으로 친일파 처단에 반대했고, 김구는 "일제에 부합한 민족 반역자들을 반드시 척결하여 민족 정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일갈했습니다. 

중요한 건 그 당시 일제를 몰아내고 (우리가 몰아낸게 아니죠) 정권을 잡고 있던 미군의 생각이 이승만과 일치했었던 겁니다. 결국 미군정은 자신들의 행정적 편의와 안보를 내세워 친일파들을 다시 대거 기용합니다. 친일파 입장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던 겁니다. 몰매맞아 죽겠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다시 몽둥이를 쥐어준 겁니다. 이 기회를 생존의 기로에 선 친일파가 놓칠리가 있었을까요? 결국 군대는 만주에서 활약하던 친일파들이 대거 들어와 다시 장교 자리를 차지했고, 경찰 조직 역시 80퍼센트 이상이 일제하에서 경찰 끄나풀을 했던 자들이 그대로 관식을 유지했습니다. 

당시 1946년 XXIV Corps Historical File을 통해 경찰조직을 보면 이게 말이 되는가 싶습니다. 총감(100%),관구장(63%),도경국장(80%), 총경(83%),경감(75%),경사(83%)의 친일경력을 볼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물갈이에 전면 실패한 해방의 시기였던 겁니다. 몽둥이로 내쫓아야 할 강도에게 몽둥이가 쥐어졌으니 그 이후는 우리가 상식으로 예상하는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 시국이었음에도 독립운동가로 구성되었던 반민특위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출발을 했습니다. 경제계 친일파였던 매판 자본가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검거했고, 김태석(이종형, 강우규 열사를 체포한 경력이 있음)을 검거했으며, 3.1운동을 진압했던 중추원 부의장 출신의 박중양을 잡았습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악명이 높았던 대표 고등경찰인 노덕술역시 체포합니다. (노덕술은 일본인보다 더 앞장서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한 인물입니다.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이런 노덕술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합니다. 그리고 노덕술은 1947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한 광복군 부사령관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체포하고 '빨갱이 두목'이라고 몰아부치고 고문을 합니다. 결국 노덕술은 반민특위가 와해되고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승진하니 대한민국의 정기가 바로세워졌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반민특위의 활약을 그대로 놓아두면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한 이해집단이 생깁니다. 정기보다는 사사로운 기운이 주류를 이루게 하고 싶은 부류들은 현 권력자들과 맞닿아 있는 이해관계입니다. 결국 이승만은 친일경찰들을 전면에 내세워 반민특위 해체에 나섰고 결국 경찰 간부 중 일본 경찰 출신 80퍼센트가 넘은 집단과 손을 잡아 '6.6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일으킵니다. 즉 국회의원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국회 내에서 스파이 활동을 한다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매카시', '매카시즘'이라고 하면 이런 색깔론으로 수많은 인명과 인권, 그리고 자유주의를 파괴한 사람의 이름이자 사건으로도 널리 쓰이는데, 뭐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현실로 일어났던 일이죠. 지금도 일부 언론과 손잡고 몇 몇 사건들을 침소봉대로 몰아가면서 색깔론으로 재미를 보려고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변함없이 제일 잘 팔리는 정치 장사입니다. 알면서 당하는 걸 보면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고 일갈하는 프랑스 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의 명언이 떠오르죠. (매카시 사건이 궁금한 분들은 미국 역사나 정치관련해서 인터넷 검색 몇 번만 해 보시면 아실겁니다.)

어쨌든 다시 역사를 짚어보면 이승만은 당시 이 사건을 공안사건 전담인 오제도에게 맡깁니다. 오제도는 보도연맹 사건, 여간첩 김수임 사건, 진보당 사건에 모두 관여했던 대표 정치검사였습니다. (이후에 1977년 정일형이 3·1 명동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여 치러진 종로 중구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9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제11대에는 민주정의당 소속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수준 참 알흠답지요?)

결국 국회와 검찰, 경찰들의 탄압으로 1949년 6월 6일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로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중부경찰서 병력 40명을 이끌고 반민특위를 습격해 무장해제 시키고 모조리 체포한 후 다시 경찰서로 끌고가 모진 고문을 가합니다. 어떠십니까?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특별법으로 만든 독립운동가 출신 단체를 친일경찰이 습격해서 거꾸로 고문한 사건이 일제치하도 아닌 해방 후 백주 대낮에 버젖이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죄가 될만한 일들을 저지르고서도 호의호식하고 그 후손들까지도 그 재산과 권력을 물려받아 떳떳이 살고 있는 나라.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나라 이야기입니다. 반면 먼 나라 선지국 이야기는 어떨까요?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엄격하고 단호했습니다. 샤를 드골 임시정부는 나치독일 부역자 200만 명을 조사했습다. 이 중 약 35만명이 재판에 회부, 10만명 이상이 유죄. 6,763명이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론은 과거사 청산 작업이 미진하고 속도가 느리다고 비판했습니다

프랑스는 4년 밖에 나치치하에서 신음하지 않았지만 나치협력자들을 예외없이 응징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구국의 영웅이라 칭송 받는 페탱 원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드골은 페탱의 부관이었지만, 프랑스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페탱의 사형선고에 동의했습니다. 
또한 프랑스는 해방 뒤 친독親獨 매국노 숙청과정에서 특히 '언론인/문인'들에겐 매우 단호한 처벌을 했습니다. 1 순위가 친나치파 언론인이었습니다. 독일 점령시 나치에게 우호적인 언론으로 2주이상 발행한 신문은 모두 없앴습니다. 그 이유를 드골을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언론이 도덕과 윤리의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치 부역자들을 과감히 처단한 드골은 다시 외세에 침입당해도 민족 반역자는 나오지 않을 거라 말했습니다.(지금 프랑스 기준으로 우리나라 언론을 심판대에 올려 놓는다면 아마 내일 조간신문 발간량은 반 정도로 줄겁니다. 그만큼 -펄프를 제공해야 하는- 나무들도 덜 죽을 거고요. 암튼 친일 청산 실패가 여럿 잡네요.)

자동차 회사 르노는 독일에 비행기와 탱크를 제작해주었다는 이유로 국유화되었습니다. 독일 대사 부인에게 꽃을 보낸 사람, 관 앞에 나치식 인사를 한 장의사도 처벌 받았습니다. 비시 정권 4년간의 부역으로 7037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1만1343명이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며, 9만5000명이 공민권을 박탈당했습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프랑스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다못해 우리보다 민주주의 시스템이 한 발 뒤져있다고 보는 중국도 '한간'이라고 불리던 '친일파'를 깨끗이 처단합니다. (1931년 ~ 1945년 사이 만주 사변, 중일 전쟁 등을 통해서 일본제국에 협력하는 자들이 급격히 늘어났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만주국, 몽강국, 왕징웨이 정권 등이 있습니다.) 그 당시 중국 국민당의 패망으로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는 한간 숙청 작업 도중 타이완으로 도망갑니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의 숙청에서 빗겨갔던 한간 세력들은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쫓겨간 뒤에도 역시 마오쩌둥 공산정권에 의해 재조사하고 처벌되었으니, 누구에게 권력이 갔어도 '친일파','반민족주의'자들만큼은 연대하여 마무리를 지은게 중국의 역사입니다. (짱깨라는 속어로 중국하면 비아냥 거리시는 분들은 최소한 민족주의 관점-특히 애국, 애족의 보수 관점이라면- 에서만큼은 중국의 근현대사 태도에 한 수 배우고, 우리나라의 교과서 개정 작업에 개탄의 돌맹이라도 한 번 던지는 팔뚝심을 보여주시는게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이후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여러분이 보시다시피입니다.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고, 미국부지 철수로 국가로 반환되어 공원으로 사용되어야 할 부평 땅까지 친일파 송병준에게 받은 거니 내놓으라고 2천5백억대의 소송을 다시 국가에 제시하는 후손들이 활개치는 나라입니다. 교과서는 친일의 역사를 지우려고 로비와 권력을 활용해 안간힘을 씁니다. 누구를 위한 나라이고, 누구를 위한 역사인지 가끔은 걸그룹, 좋아하는 프로야구 중계 챙겨보는 만큼의 반의 반 정도만큼이라도 생각해 보아야 할 주말입니다. 

p.s) 주말이라 글이 길어졌네요.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간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올바른 미래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매국자들과 결탁하여 결국 홀로 서기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이렇게 3대를 걸친 후손들이 계속 비용을 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여러분 삶의 수많은 문제들의 뿌리를 곰곰히 따져보면 '역사'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올바른 삶이란 올바른 생각과 행동에서부터 출발합니다.양코치가 '민족문제연구소'같은 곳에 후원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올바른 일에 올바른 관심을 보여주는 것. 내 아이들을 위해, 내 후손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는 밑거름입니다. 

p.s)오늘 글은 이동형씨의 [와주테이의 박쥐들], 위키디피아 [한간],[매카시], 시사인 [보수세력이 친일파 되살리는 까닭은?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58] 민족문제연구소 ['민영은 후손 땅찾기 저지' 시민운동 확산http://www.minjok.or.kr/kimson/home/minjok/bbs.php?id=comm_news&q=view&uid=7979], 경향신문 박래용 편집장의 [청산하지 못한 역사, 그 후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262120045를 참조했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반론 환영합니다. 대신 제대로 된 글로 의견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p.s) 친일 경찰과 연관하여 친일 군대 역시도 우리 나라 역사에 청산하지 못한 썩은 뿌리들 하나입니다. 이런 친일경력을 가진 군대는 '만주'인맥과 연관이 깊죠. 협화회, 만주군관학교, 만주 건국대, 대동학원, 봉천군관학교, 간도특설부대 등이 친일로 여러 활동을 펼칩니니다. 특히 만주군관학교는 아마 '박'씨 가문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면 한 번씩은 다 아실만할 겁니다. 군대 이야기는 또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루기로 하지요.

    필자소개 : 정곡(正谷) 양정훈 (기업사내코치 전문가, 작가, 리더십 FT, 자기경영혁신가)

   2006년부터 매년 300권 정도 지인들과 함께 매일 한 권의 책읽기와 한 편의 칼럼을 나누고 있으며 
   작가의 꿈을 가진 [꿈꾸는 만년필]분들과 글쓰기 공부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전문강의로는 독서코칭, 시간관리 코칭, 글쓰기 코칭 등이 있으며, 
   네이버에서 교육분야 2008,2009 초대 파워블로거, 국제코치협회 인증코치, 한국코치협회 전문코치로 활동 중입니다
   월간HRD협회 선정 2013 베스트 코치이며

   저서로는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나만의 첫 책쓰기] / [내 책은 하루 한 뼘씩 자란다] / [9 to 6 혁명]
            전자책 나도 한번 내볼까?(공저) / 청소년을 위한 시크릿 : 시간관리편 (공저) 등이 있습니다.

   Blog : www.yangcoach.com  / E-mail: bolt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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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살이, 천년살이 


"지난 3,000년 역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 뿐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로먼 크르즈나릭의《원더박스》중에서 -


* 조상이 남긴 전통과 지혜,
역사가 전해주는 의미와 교훈,
얼마나 잘 살리고 잘 이어가느냐에 따라 
우리는 하루살이가 될 수 있고
천년살이도 됩니다. 


제 아이를 기르기 위한 테마로 


철학, 역사, 정치를 꼽는데요


위 글은 역사에 대한 정~말 좋은 표현 같아 옮깁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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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과 역사가 연결된 좋을 글이 있네요

(저는 육아 방침으로 철학, 정치, 역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사관련 내용이라 ㅎㅎㅎ ^^)

  

학습하지 않으면 삶에 의미있는 변화는 없을 겁니다.

 

 

일상은 그냥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조금 더 잘 돌아가는 기계일뿐.

 

더 낳은 삶을 위해 학습해야 합니다.

 


 

   
역사공부로 통찰을 얻은 프리드리히 2세  
예병일 이 노트지기의 다른 글 보기 2013년 5월 20일 월요일
어느 대위가 프리드리히 2세에게 "폐하처럼 훌륭한 전략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왕은 전쟁사를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했다. 나중에 나폴레옹도 똑같은 질문을 받고 "전쟁사를 공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젊은 장교로부터 이 질문을 받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몽고메리 원수의 대답 역시 같았다.
대위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자신은 그런 이론보다는 실전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대에 전투를 60회나 치른 노새가 두 마리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노새다." (57p)
임용한 지음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 3040을 위한 인생 전략 특강' 중에서 (교보문고(단행본))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1712~1786).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볼테르와도 교류하는 등 '계몽전제군주'로 유명했던 프로이센의 국왕입니다.
전형적인 군인이었던 부친과는 달리 젊은 시절에는 문학을 좋아하고 전장에서 플룻을 불었던, 하지만 나중에는 '전제군주'가 된 인물입니다. 그는 부친이 남긴 군대를 기반으로 슐레지엔전쟁과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작은 나라 프로이센을 강국으로 키웠지요.
 
그는 전쟁터에서 기존의 전략전술을 답습했던 적국들과는 달리 기동성을 중시한 측면공격 전술을 새롭게 시도함으로써 불리했던 세력판도를 극복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훌륭한 전략가가 되려면 전쟁사를 열심히 공부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부대에 전투를 60회나 치른 노새가 두 마리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노새다." 그는 이 인상적인 표현으로 실전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강조했지요.
 
새로운 혁신을 실천할 수 있는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서 역사와 철학,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천 방과후 학교  http://cafe.naver.com/bcforest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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