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지만 아쉬운 영화

[특별기고-강정구 교수] 다시 보는 역사의 진실


설 연휴를 맞아 모처럼 ''실미도''라는 영화도 보고 ''한씨 연대기''도 관람하는 ''문화생활''을 즐겼다. 두 가지 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담은 것이기에 나의 구미를 당겼다. 훌륭한 작품들이었지만 나를 더욱 기쁘게 한 점은 젊은이들이 관람객의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실미도''는 어디까지나 영화이기에 북파공작원에 관련된 역사의 진실을 한정적으로 다루고, 또 단순화하여 극단화하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영화 자체로만 판단하면 당시 정치적 결정에 의해 공작이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주석궁을 요절냈을 터이고, 그랬더라면 통일이 됐을 것이라는 ''순진하고'' 어이없는 망상을 할 수도 있다.

이에 필자는 실미도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북파공작원 관련 역사적 진실을 일부 밝히고, 이 영화가 가져올 수 있는 그릇된 역사해석을 경고하고자 한다. 이로써 우리 현대사의 뿌리와 참모습을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비판력을 기르는데 조그만 기여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북파공작원 관련 역사의 진실

진실 하나

실미도는 북파공작원, 다른 말로는 북파 무장간첩 이야기다. 이제까지 우리는 간첩은 북한만 보내는 것으로 믿었지 남한이 북한에 보낸다는 것은 좀처럼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정보사령부에 의하면 휴전이후 남한이 북한에 보낸 간첩가운데 실종된 사람이 7726명이며 이들의 위패를 전부 모시고 있다한다.

또 미군이 북파했다 실종된 간첩이 3천명이란다. 물론 이 숫자도 MBC가 2002년 2월 24일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미군이 주도한 KLO대원들은 터무니없이 축소된 숫자라고 강변하고 있어 축소된 숫자일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간첩들을 북한보다 남한이 오히려 더 많이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국회의원 김원웅은 국방부 자료를 인용해 1950년 이래로 1999년까지 총 남파공작원은 6446명이며, 그중 생포자 3177명, 사살자 1644명, 자수자 275명임을 밝혔다.(<동아일보>-2000-11-8).

이 남파간첩 통계에 의하면 휴전이후 남한에서 생포, 사살, 자수자가 5096명이고 1350명은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남파간첩의 생존 북한 귀환율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전체 남파간첩 숫자는 파악하기 힘든다.

북파간첩의 경우 <신동아>(2001년 1월 호)에 의하면 50년대 북파 간첩의 생존율은 겨우 10%에 지나지 않았지만 60년대 이후는 90%에 이른다고 한다. 60년대부터 북파간첩으로 갔다 실종된 숫자는 약 2150명으로 알려졌다. 이렇다면 실제 남한이 북파간첩으로 파견한 숫자는 최소한 연인원 2만1500명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이 정도면 미군이 북한에 보낸 간첩을 빼더라도 남한이 북한보다 더 많은 간첩을 보낸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물론 실미도와 같은 북파공작원 부대는 백의사, HID(Higher Intelligence Dept.), KLO, 호림부대, 구월산유격대, 동키(Donkey), 블루보이스(Blue Boys), AIU, 해군ONI, 해군359부대,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 CID, 공군첩보대, 단독침투 특수부대인 관악산부대, 대만의 장개석첩보부대 등으로 다양하게 존재했었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이러한 역사의 진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그 결과 나쁜 짓은 북한만 하는 것이지 남한과 미국은 하지 않는다는 허구 속에 우리가 빠져 있은 셈이다.

진실 둘

설악부대 등의 훈련과정을 보면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정도의 훈련강도를 훨씬 능가하는 반인륜적이고 극한적 훈련과정이 실제 있었다. 훈련병이 굶주리고 지쳐서 도망을 쳐다 붙잡히면 동료들로 하여금 그 도망자를 돌과 주먹으로 쳐죽이게 하는 잔인한 처벌도 있었다. 또 영화와는 달리 먹거리를 주지 않은 채 훈련병을 산 속에 보내 며칠동안 칡뿌리와 뱀, 도마뱀, 다람쥐 등을 잡아먹게 하는 훈련 등이 있어 훨씬 더 극한적인 상황에 그들은 시달렸다.

2002년 3월 15일 200명의 북파공작원들이 서울 광화문에서 도심시위를 하면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이들은 "입사에서 퇴사까지 단 한 번의 외출, 외박, 면회, 휴가가 없었던 24시간 완벽한 통제 속의 생활"했으며 성적인 욕구도 ''가끔 산속 창고에서 위안부와 관계를 맺는 것으로 해결해야 했다''한다.

김 아무개(40)씨는 82년 10월에 설악산에 있는 개발단에 들어갔고 당시에 40여 명의 동기가 있었는데 이중 복아무개라는 동기가 탈영을 했다가 잡혀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부대에서는 복씨를 감금한 채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나중에는 ''배신자''라는 간판을 목에 걸고 동기들로 하여금 3시간 동안 끌고 다니면서 때려죽이게 했다. ''나는 동기를 때려죽였다는 죄책감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동기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맞아죽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정보사는 나아가 간혹 탈영하다 잡힌 사람들을 배신자 처리의 본보기로 발가벗긴 채 족쇄와 올가미를 씌워 끌고 다니며 동료들로 하여금 소꼬리 채찍이나 싸리나무, 몽둥이로 때려죽이게 했다"고 전한다(<오마이뉴스>, "우리의 한 맺힌 인생을 보상하라", 2002. 3. 15)

진실 셋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남이나 북이 서로 간첩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파견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이 희생자들에 대한 배려에서 남과 북은 극히 대조적이다. 북은 6.15공동선언에서 비전향장기수(대부분 남파공작원)의 송환을 명문화해 이 남파공작원의 존재를 일찍 인정하고 송환까지 요구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결과 송환된 장기수에 대해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치렀고, 평양에 에어콘이 달려 있는 아파트를 배당하고, 결혼을 주선하는 등 이들에 대한 보상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러나 남은 북파공작원의 가스통시위 등 격렬한 저항운동으로 사회문제화 되기 전까지는 북파공작원 존재자체를 부인했을 뿐 아니라 겨우 작년 연말에 국회에서 보상법을 통과시키는 정도였다. 이전에는 보상은커녕 오히려 이들을 감시 및 정탐하여 이들의 생존권 자체를 방해하는 일들을 국가가 자행했다. 이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 인권적 인간이 아니라 그야말로 단순한 인간 소모품으로 취급된 셈이다. 또 영화와는 달리 실미도 사건에서 살아남은 공작원은 네 명으로 정식 재판에 회부되어 결국 사형을 당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이들은 진실을 폭로하지 않고 당국이 요구하는 대로 거짓 진술하면 생명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에 꾀어 거짓 진술을 했으나 결국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셈이다.

진실 넷

남쪽이 주도해 보내거나 양성한 북파공작원에 대한 전모는 조금씩 밝혀져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고 있지만 미군이 보낸 공작원의 실체는 전혀 드러나지도 않고 언제 밝혀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앞의 정보사 발표에서도 미군이 보냈다 실종된 숫자가 3000명이었다. 또 최근 MBC가 밝힌 바와 같이 어부들을 위장 월선시켜 간첩행위를 한 공작에서도 그 훈련을 부산 미군부대인 하야리아부대에서 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제 미군에 의한 피해자도 당당히 나서고, 우리 정부도 머뭇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또 보상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군이 저지른 북파공작원 전모도 그 진실이 규명되고 알려져야 할 것이다.

진실 다섯

영화에서는 공작원 모두가 사형수와 같은 범법자였지만 이는 부분적인 사실에 불과하고 많은 수는 엄청난 보상 등을 미끼로 모집된 청장년들이었다. 신출귀몰한 탈옥수 신창원을 경찰에 신고하여 체포하게 한 광주의 김아무개는 대북 첩보부대 HID의 후신인 AIU(Army Intelligence Unit) 출신이었다. 그는 89년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특수부대에 입대해 특수부대에 근무하였으므로 90년대 초까지 이 첩보부대는 활동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구체적인 부대이름은 밝힐 수 없다. 국가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간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특수부대도 국가가 불러서 갔다. 훈련과정에서 ''나''를 버리게 됐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 목숨은 국가를 위해 있고 언제든지 바칠 수 있다. 그런 의무감과 사명감이 있어야 자긍심도 생긴다"고 말할 정도로 긍지를 가졌다고 한다. 분명히 자포자기한 범법자가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일반 시민이었다.

<<동대문 청년회 발취 http://youth.jinbo.net/>>

부모가 자식을 이유없이 사랑함에 아가페적 사랑이라 부릅니다.

국민의 애국심이 아가페적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순수한 사랑을 이용하는 국가를 자식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은

자식이기 전에 인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에 집착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이상

결과주의 민주주의 공화국인 우리 사회는 병들어 갑니다.

내일 2탄







황산벌을 보았습니다.

역사 코믹 영화로 소재는 모두가 아시다 시피신라,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치는 과정에서 신라의 김유신과 백제의 계백이 일대 격전을 벌인 황산벌 전투를 극화한 것입니다.

그 치열했던 과거 전쟁을 각 지역별 사투리로 구수하게 엮어 친근하게 역사에 접근하였습니다.

영화촬영상으론 대규모 전투신의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전투신도 있었지만 이미 반지의 제왕등에 익숙해진 눈으론 성이 안차는 건 어쩔 수 없나봅니다.^^'' 보신 분들은 전투신의 엉성함을 금방 아셨을 겁니다. ^^;

막상 남는거 없을 것 같은 코믹 영화를 이렇게 쓰는 이유는

제게 역사의 한 장면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의도했건 안했건간에

전쟁의 비정함과 장수의 마음가짐

전투에 임하는 장수의 마음과 심정이 계백(박중훈)의

''아싸라게~ 거시기 해불자~!''

라고 외치는 웃기는 말에도 감동하게 하고

두려웠던 박중훈을 마지막 전투에서 무릎 굽히고

''와이리 덥노''

라고 말하는 김유신(정진영)의 떨리는 눈에서 전쟁의 비정함과 동족에를 느낍니다.

이에 충혈된 눈으로 화답하는 박중훈

''겁나게 덥구마이''

이 모든 장면이 어처구니 없는 사투리에도 강하게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연기자가 관객에게 그느낌을 충분히 전달해 냈다고 생각됩니다.

과거를 되집어 생각하면 당과 손을 잡고 정책적으로 전쟁을 해야만 했고

수많은 화랑과 부하를 희생시켜 임무를수행했던 김유신과

왕자와 귀족간에 당쟁으로 무능한 나라였으나

아내와 자식까지 희생하여지켜야 했던 계백의 어쩔 수 없는 싸움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전쟁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몇일전 영화를 보았습니다.

두 영화

실미도, 말죽거리 잔혹사.

이 두 영화의 기본 설정과 큰 틀은 시대의 아픔이라 이름 짓고 싶습니다.

실제 사건을 극화한 내용은 물런이거니와 그 시대의 배경을 실질적으로 표현하는 모습을 훌륭하게 스크린에 담았다 하겠습니다.

내용은 다 아시니까 기억나는 몇 장면 그려 볼려고 합니다.

우선 실미도에서 설경구가 그의 조교와 맞짱 뜨고 뒤늦게 처벌을 받을까 당황하여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설경구는 월북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반공 의식이 하늘을 찌르는 당시 월북은 간첩으로 인식되는 이념의 틈에서 설경구에게 갈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삐뚤어진 길을 것습니다. 그러나 이 섬 실미도에서 그에게 다른 길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그의 단 하나의 희망

''어머니'' 입니다.

북에간 아비를 대신하여 한번도 발을 뻣고 주무신 적이 없다는 어머니.

무슨 염치로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게느냐는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효성이라 표현하면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해보이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언제나 잠들어 있는 모정을 기억합니다.

아.... 한장면 설명하는데 이렇게 기내요....


다음에 계속쓰겠습니다.

저도 회사가려면 자야죠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