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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심은

숲, 교육, 건강, 사회현상, 춤, 사진, 운동(농구,스키 등)

너무 많네... ㅎㅎ





다음은 경향신문의 [별별시선]에 나온 이야기를 보다가
김지숙 소설가가 쓴 내용인데, 크게 공감하여 옮겨 본 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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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에게 저녁이 있어야 했다. 그랬다면, 퇴직한 뒤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우울해지고 마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는 때때로(주로 음주 뒤에) 젊을 때는 글을 쓰고 싶었다는 
말씀을 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 ‘한때 글을 곧잘 쓴다는 얘길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다 잊어버렸다’ ‘너네 엄마한테 쓴 연애편지가 마지막 작품활동이다’ 등이 자주 등장하는 레퍼토리였다. 


아빠에게 퇴근 뒤의 삶이 있었더라면, 시 한 줄 적을 여유가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일기라도 끄적거릴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퇴직 후의 소회를 시로 쓰며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빠는 화분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식물을 보면 욕심을 내지만, 
분갈이를 하거나 물 주는 법은 알지 못했다. 직접 키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잎이 시들해진 식물이 있으면,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한 거냐’고 엄마를 나무라며 회사에서 중간관리자로 살아온 오랜 세월의 
면모를 드러냈다. 아빠에게 저녁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숙면을 취하고도 남는 시간이 있었다면 
아빠는 식물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은 호스를 들어 화분에 물을 주었을 것이고, 
식물의 잎이 물을 맞아 선명해지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식물을 감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키우는 재미를 알았을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관심분야가 무엇인지를 잊게 된다. 
이소룡을 흠모하던 소년이 자라 영업용 골프만 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그것도 즐거운 운동으로서의 
골프가 아니라 높으신 분에게 연신 ‘나이스 샷’을 외치고, 몇 타씩은 져주는 친절한(?) 골프에만 익숙해졌다. 


세계명작 소설 읽기를 좋아하던 학생이 직장인이 된 뒤에는 신문과 보고서에 있는 활자 외에는 
읽지 않는 사람이 되어간다. 언젠가 돈을 벌고 시간이 나면 폭넓은 독서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서점에 가서 돈 주고 산 책은 자격증 관련 서적뿐이다. 이미 자신의 생활패턴과 관심사가 
직장맞춤형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일에서 자아를 발견하면 이상적이지만, 축복받은 소수에게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프랑스 작가인 미셸 트루니에가 했다는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라는 유머 섞인 명언에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문제는, 직업이 곧 삶이 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조직 밖으로 내처진다는 것이다. 직장에 맞춰 구조화된 삶을 늘어난 시간에 맞게 대수술해야 하는 것이다. 옛 추억만 떠올리며 이미 멀어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더듬어보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조직으로부터 버려진 듯한 배신감과 공허함이 들고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며 ‘중년의 위기’에 빠진다. ‘저녁이 없는 삶’의 후유증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못해도 두 가지, 가능하면 다섯 가지 정도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본연의 나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자신이 퇴직 후에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황,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을 두려워해야 한다. 

좋아하는 것을 찾고 개발하고 가까이해야 한다. 이를테면, 퇴직한 뒤 통나무집을 지어보고 싶은 꿈이 있는데 
나무 쪼개는 것을 두려워하면 어떡하겠는가. 한때 문학청년이었으며 글을 쓰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을 
꿈꿔왔다고 말하는 중년남자들을 꽤 많이 봤다. 그저 가지 않은 길을 아쉬워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열망을 실천으로 옮기는 분들도 만났다.


문학모임을 하면 회사생활만 수십년 하다가 뒤늦게 소설을 배우기 시작한 남자분들이 꼭 몇 분씩 있었다. 
그 중 한 분은 긴 글을 쓸 만한 시간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하이쿠(일본 특유의 단시)에 맛을 들였다. 
어떤 분은 늦게 배운 글로 20대 못지않은 세련된 글솜씨로 신춘문예 최종심에도 몇 번이나 올랐고, 
응모할 때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는 신문사에 항의전화를 할 만큼 멋진 문학청년이 되었다.
(나 역시 작품을 평가하는 데 나이를 반영하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그런 분들을 존경한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체력과 시간과 의욕을 쪼개어 뭔가를 해나가는 것이다. 

다시, 회사가 거의 유일한 세상이었고, 그래서 그 세상이 되어버린 아빠를 떠올린다. 
젊은 때의 아빠는, 돈은 없고, 일은 많았을 것이다. 취미생활은 호사스럽게 느껴지고, 
가족들에게 죄의식마저 느꼈을 것이다. 나는 아빠에게 ‘지금 시작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던 아빠가 야근하고 회식까지 한 어느 날, 집에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들고 있던 갈색 서류봉투에 멋진 필체로 휘갈긴 글이었다. 
지하철 막차 안의 풍경과 직장인으로 나이든 소회를 버무린 열 문장 정도의 글로, 마치 산문시 같기도 했다. 
몰래 휴대폰으로 찍어둔 그 글을 다시 아빠에게 보내야겠다. 그리고 말씀드려야겠다. 조금 어색할지라도, 

아빠는 지금도 시를 쓸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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