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에는 정평이라는 이름의 정류장이 있습니다. 서울의 강북에 가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5500번 버스를 탑니다. 어떨 때는 두 세 명이 타고 어떨 때는 대 여섯 명이 타기도 합니다. 정평정류장은 시내버스, 시외버스 직행버스 등이 경유하지만 노선별 버스 스톱이 세워져 있지 않아 승객들이 무질서하게 서있는 곳입니다. 줄을 서지 않기에 버스가 도착하면 먼저 타기 경쟁이 벌어집니다. 좌석도 여유가 있고 타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질서가 없으므로 늘 불편합니다. 승객들은 버스가 오면 일제히 도로경계석에 섰다가 차가 멈추면 문 쪽에 서있는 사람이 먼저 타는 행운을 거머쥡니다. 일찍 나와서 먼저 기다려도 소용없는 곳이 정평입니다.
정평 다음 정류장은 지역난방공사입니다. 여기서는 누구나 정확히 줄을 섭니다. 그래서 편안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정평에서 타던 저도 요즈음은 지역난방공사에 가서 버스를 탑니다. 줄이 길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좌석이 없으면 조금 기다렸다가 다음 차를 타면 되니까요. 질서는 편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는 공익광고의 슬로건이 이 정류장에서 사실로 입증됩니다.
질서를 만드는 줄서기에서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사람의 역할입니다. 두 번째 온 사람이 먼저 온 사람을 인정하고 그 뒤에 서주면 질서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이 첫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고 자기도 첫 사람이 되겠다고 나서면 줄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세 번째 사람이 나타나면 그는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따로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네 번째, 다섯 번째 식으로 사람이 늘어나면 곧 바로 아노미가 되고 맙니다. 정평이 바로 그렇습니다.
두 정류장을 보면서 이것이 리더십의 메타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간단한 이치이지만 리더 혼자서 좋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첫 사람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살려 주어야 리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줄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첫 사람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 무리 전체가 혼란을 겪게 됩니다.
리더십과 관련해 오래 전 한 신문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공자가 오늘날 불후의 사상가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1백년 후에 태어난 맹자의 공로가 지대했다. 석가의 가르침이 맥을 이어가는 데는 아난존자의 비상한 기억력이 한몫을 해냈다. 예수의 사상이 기독교로 발전하는 데는 사도 바울의 헌신이 절대적 공을 세웠다. 독배를 마시고 죽어간 스승 소크라테스를 성인으로 부활시킨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위대한 인물은 타고난 위대성에다 훌륭한 추종자들의 헌신에 의해 완성되고 계승된다.
앞장서서 끌고 가는 사람을 리더(Leader)라고 한다면 뒤따르며 밀어주는 사람은 폴로어(Follower)라 하겠다. 리더에게 리더십이 필요하듯 뒤따르는 협력자에게는 폴로어십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의 병폐로 리더십의 부재를 지적하는 사람은 허다하나 폴로어십의 부재에서 문제를 풀어보려는 시도는 미약한 것이 현실이다. 이래서는 건전한 리더십이 작동되기가 어렵다.』
요즈음 각 정당을 보면 첫 번째 하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노미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모여 있으나 질서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제대로 된 두 번째 사람이 출현해야 이 무질서가 끝날 것입니다. 정치권 사람들이 수지에 와서 한 패는 정평에서, 다른 한패는 지역난방공사 정류장에서 5500번 버스를 타보기를 권합니다. 두 번째 사람, 정말 중요합니다.
(2007년 2월 5일)
영화, 광고 등에서 2인자는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데...
2인자의 역활이 새삼중요하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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