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향기 Lett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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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훈의 <삶의 향기>]

#1478호 - 자유의지는 없는가?


살면서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내가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더욱 책임감 있는 행동을 수반하게 하니까요. 그러나 이런 나의 자유의지 몇 밀리세컨( * 1밀리세컨은 1,000분의 1초)전에 내 뇌가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면요? 그렇다면 나의 자유의지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은 인간이 자신의 움직이기로 결심했다고 느끼기 300밀리세컨 전부터 뇌의 운동피질에서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을 뇌파검사를 사용하여 증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뇌의 결정을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니면 뇌가 '자유의지'라고 느끼도록 착각하게 만들어주는 걸까요? 뇌와 자유의지가 다르다면 자유의지는 어디서 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유의지는 없다]의 저자 샘 해리스는 이 병리학적, 생화학적 불편한 진실을 곁들여 철학적 유물론에 회의적 접근을 시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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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고 힘빠지는 생각들도 있고, 힘을 주는 생각들도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원하는 사고를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앞선 사건들의 산물이며 그 사건들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잠시 시간을 들여 당신의 다음 번 결정이 어떤 맥락에서 일어날지 생각해보라. 당신은 부모님을 선택한 적도 없고, 생년월일이나 출생지를 선택한 적도 없다. 성별도 선택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인생 경험들도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게놈이나 뇌의 발전에도 아무런 통제권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의 뇌는 일생동안 주입되어 온 성향과 신념에 기초하여 선택을 내리고 있다. 더욱이 그런 성향과 신념은 당신의 유전자, 어머니의 자궁과 착상된 이래 이루어진 신체 발육 상태, 타인과 사건들과 아이디어들과 가진 상호작용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 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는가? 물론 지금 당장 당신은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당신의 욕망은 어디서 왔는가?

                샘 해리스 [자유의지는 없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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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내 마음대로 시작된게 없죠. 부모님, 생년월일, 그리고 태어난 지역, 이 모든 것이 엄청난 우연이자 제게도 행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읽게 된 것도 사실 어떤 환경이나 계기가 습관화를 시작시켜주었겠죠. 물론 시작만 그렇게 했고, 결국 이렇게 계속 읽는 건 나의 의지 아니겠느냐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습관화 되고, 글을 써야지. 책을 읽어야지 결심한 것도 이미 뇌가 최적의 판단을 내리고 '내가 선택했다'고 하게끔 착각하게 만든거라면요?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일까요? 진정 내가 선택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요? 이 혼란스러운 주장과 각종 사례는 뜻하지 않게 돌아가는 우리의 인생을 설명해 주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또한 뜻하게 (예상대로) 돌아가는 인생을 설명하는데도 역설적으로 효과적입니다. 

우연이든 우연이 아니든, 예상가능하든, 예상 가능치 않던 어쨌거나 우리의 '자유의지'라는 개념으로 선택된 건 없다라는 사실 만큼은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분명하니까요. (결정론자와 자유론자의 주장을 모두 포함한 양립가능론을 '꼭두각시는 자기를 조종하는 줄을 사랑하는 한 자유롭다'라는 말로 비판합니다.)

여기까지 따라오다보면 이 얇은 책은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들기 충분합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뭘 어쩌라는 거야?' 우린 자기 마음대로 심장을 뛰게 할 수도 두뇌를 멈추게 할 수도 없습니다. 내 마음이라는 것이 할 수 있는게 움직이고 읽고 쓰고 맛보고 하는 동물적 움직임인데 그마저도 뇌가 먼저 결정을 한다면요? 

각자의 관점으로 정리해 볼까요? 저는 '자극을 느끼는 범주의 신체기능과 함께 존재하는 어떤 객체'로서 저 자신을 정의해 보았습니다. 이 자극은 쾌감일 수도 있고, 통증일 수도 있지요. (어쨌거나 지금 저는 바깥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뇌도, 뇌에 의해 움직이는 그 어떤 신체기관도 저의 일부입니다. 자식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내 자식이 아닌 건 아니듯, 신체와 뇌, 심장과 허파, 혈관과 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 칩니다. 이타적 희생을 감내하거나 신체적 기관이 노쇠해 작동을 멈출때까지 이들은 나와 함께 합니다. 나란 생각을 주게 하고, 상대방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하는 뇌도 나의 일부입니다. 

내가 선택하진 않았지만 우리(라는 표현이 좀 이상한가요?)가 함께 �어지고 가야 할 공동운명체입니다. 서로 속이기도 하고, 먼저 명령 내렸다고 뻐기기도 하겠죠. 그러나 같이 살고 같이 죽으려고 (가능한) 노력할 겁니다. 만약 제가 살인을 했다고 가정해 보죠. 의사들의 정밀 진단 결과 그것이 내 뇌의 종양때문에 일어난 일일지라 할지라도 타인에게 더 큰 또다른 피해를 주기 전에 저는 구속되고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처벌받는) 결정을 지금 뇌만 결정하고 싶어도 몸뚱아리 전체가 같이 책임지는 겁니다. 

이런 하나의 사건에 대해 자유의지의 의심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에라도 저는 공동운명체의 관점을 대입시켜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야만 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의 행동과 관습을 예측하고 불확실성을 파악하는데 드는 에너지를 조금 더 생존의 메커니즘을 연장하는데 활용할 테니까요. (아마 각자의 뇌들도 그것이 더 효율적일 거라고 알고 있을 겁니다.) 자유의지는 없다. 좋습니다. 없어도 좋고 있어도 좋습니다. 우리의 관습과 나보다 먼저 결정내리는 뇌 때문에 이렇게 오늘 하루 살아가도 좋습니다. 다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선택할 수 없이 주어진 것들만큼, 앞으로도 선택할 수 없이 생겨난 많은 순간들을 사랑하겠습니다. 

이 사랑 역시도 제 선택이 아니고 뇌의 선택이라고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사랑을 선택한 뇌라면 제 선택이 아니라도 좋은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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